전쟁중 11살 때 황해도 해주서 목숨건 탈출- 송영석의 천로역정 (1)

북한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되던 해에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38선 인근에 있던 연안도 전화에 휩싸였고 부친과 누나들 그리고 형이 먼저 남쪽으로 피난가고 어머니와 나, 남동생과 그리고 두 여동생이 연안에 남게되었다.

당시 젊은 남자는 인민군에 징집될 수 있다고 해 젊은 남자들부터 먼저 이남으로 내려갔다. 15살인 형이 중공군에게 잡혀 겨우 풀려나자 부모들은 재빨리 이남으로 피신시켰다.

전쟁이 일어 난 지 일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나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동무들과 함께 만나 신나게 놀다 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집에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열어 보았으나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부엌 바닥 자루에있던 날감자 몇개를 먹고 또다시 밖에 나가 계속 놀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니 이상하게 입속 혀 밑이 땡기고 불편해 지면서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집에 돌아 어머니에게 아픈 곳을 보이니 혀 밑에 큰혹이 생겨난 것을 알았다. 겁에 질려 울기만 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내일 아침 날이 밝는대로 인민군 병원에라도 찾아가 보자고 하시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나는 제대로 잠도 못자고 밤새도록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아침에 어머니와 함께 인민군 병원을 찾아가기 위해, 몇 시간을 걷는 중에 갑자기 뒤 쪽에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 하늘을 쳐다보니 남쪽에서 폭격하러 날아 오는 쌕새기라고 부르는 제트 폭격기가 눈에 들어왔다.

생감자 독으로 입안에 혹 생겨 벙어리 신세우리 머리 위를 얕게 날아가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총 사격과 포탄을 퍼붙는다. 여러 대가 한참 폭격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폭격이 끝나고 비행기들이 돌아간 다음에야 계속해서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한참 만에 찾아간 병원은 산속 땅굴 속에 있었다. 들어가 보니 중상을 입은 인민군들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에 의사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또 많은 시간을 기다리다가 어렵게 군의관을 만났다. 어머니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군의관은 내게 입을 벌려 보라고 한다. 그리고는 혹에다가 무슨 약을 발라 주고는 이제 집에 가면 나을 것이라고 해서 믿고 돌아왔으나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약이 노란색으로 기억나는데 아마 옥도정기가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이 많으셨다. 엄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튿날부터는 나를 데리고 매일 이동네 저동네 노인 분들을 찾아 다니면서, 나의 입속을 보이고는 어떻게 하면 이 혹을 없앨 수있겠느냐고 물어 보신다.

옥도정기만 발라준 인민군 야전병원

그러던 어느날 한 분이 관심을 가지고 내 입속을 들여다 보시고는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하시며 몇 가지 지시를 하셨다. 집에서 안쓰는 사기그릇 한개와 대나무 젓가락 한개 그리고 조그만 칼과 실을 가져 오라고 했다. 부지런히 지시한 것을 준비해 가지고 다시 찾아 갔다. 

그분은 먼저 사기 그릇을 달라고 하시고는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살피시더니, 박힌 돌에 다가가 들고 있던 사기 그릇을 그 돌에 던져 깨뜨린다. 그리고는, 박살난 것들 중에 칼날같이 아주 예리한 것을 골라 줍고는, 이번에는 대나무 젓가락과 칼을 달라고 하신다. 

자세히 보니 대나무 젓가락을 칼로 한 쪽을 약간 쪼개고는 칼날 같이 예리한 사기를 갈라진 틈에 끼우고 실로 양쪽을 동여 매니 도끼 모양이 되었다. 그것을 내 아랫 입술과 턱 중간에 사기 끝을 갖다 대고는 가운데손 가락으로 탁치니 그 곳에서 피가 나왔다. 그리고 이젠 된 것 같다고 하시면서, 집에가서 며칠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집에 돌아와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신기하게도 혹이 좀 작아지고, 아직불편 하지만 말도 좀 할 수있었으며 음식도 조금씩 먹으니 어머니는 너무나 좋아 하셨다. 그리고 “영석아 이제는 네 입병도 나아지는 것 같다. 감자 눈에는 독이 있으니 앞으로 절대 날로 먹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이 삼일정도 지나니 나아지는 줄만 알았던 혹이 다시 부어오르면서 고통이 찾아와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나를 불러 “영석아, 이제 여기서는 네 입병을 고칠 방법이 없겠구나”하시면서 “시간을 더 끌다가는 혹네가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면 큰 일” 이라며 걱정을 많이 하신다.

팬티에 금가락지 3개 넣어준 어머니

며칠이 지난 어느날 집에 한 손님이 찾아 오셨다. 그 날 아침에 어머니는 나의 팬티 고무줄에 금가락지 두개와 백금반지 한개를 묶어 주시면서 이 팬티를 입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나를 불러 찾아오신 손님에게 인사를 시켜주었다.

“오늘밤 너를 데리고 이남에 내려 가실 분이시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저씨 뒤만 꼭 따라가야 한다. 알았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길을 잃어 버려 큰일나게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시고는 내 잔등에 보따리를 지워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이 순간이 결국 나와 어머니와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우리 가족 중에는 이미 아버지와 형 그리고 누이 둘이 이미 남한으로 내려 갔으나, 아무 누구도 남한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없어서 어머니는 늘 궁금해 하셨다.

날이 어두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일행들과 함께 조심 조심 한참을 걷다 보니 바다가 보이고 갯벌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참을 걷는 중에 뒷 쪽에서 누군가가 우리 일행을 향하여 요란 스럽게 총을 쏘아대는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다들 흩어져 갯벌에 바짝 엎드려 숨을 죽이고 총 소리가 멈추어 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계속되는 총소리에 여기서 총맞어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생각난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며칠 전에도 남쪽에서 날아온 비행기들의 폭격 때문에 죽을 고비도 맞었고 폭격 맞아 집들이 파괴 되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것도 보았다.

또 그 전에는 반동 가족 수백명이 함께 학살당한 곳에도 동네 애들과 함께 겁도없이 일부러 찾아가 널려져 있는 시체들을 보고 돌아온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총소리로 갯벌에 업드려 죽음의 공포 느끼고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들을 죽이려고 총을 쏘아대니 무섭기만 하다. 어떡하면 여기서 살 수 있을까? 정말 무섭기만 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동네 애들 한테 들었던 하나님 생각이 떠 올랐다. 이제 나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하나님 저좀 살려 주세요!”하며 마음 속으로 웅얼거렸다.

 이런 저런 생각을 잠시 하는 동안 총소리가 잠간 멈추었고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안내인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이미 갯벌에는 안개가 끼었고 어두워 졌으며 또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어른들을 좇아서 뛰고 있는데 갑자기 뱃속에서는 계속 꾸륵 꾸륵 소리가 나더니 설사가 나는 바람에 잠시 멈춰 급하게 일을 보고 일행들을 곧 좇아가 뒤를 따랐지만 두번째로 일을 보고 일어나니, 눈 앞에 꽉긴 안개와 어두움에 전혀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일행들의 뛰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시끄러운 바닷물 소리만 들린다. 안내인과 일행들을 잃어 버렸으니, 이제 나는 큰일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는지. “ 안내인 아저씨 뒤만 따라 가야 한다”고 하신 어머니가 생각 난다. 이제 일행들을 잃어 버렸으니 만약 찾지 못한다면 여기서 죽겠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 일행을 다시 만날 수있을까?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아저씨 저 좀 데리고 가 주세요””아저씨 어디 계세요?” 라고 큰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목 소리가 나오질 않으니 큰일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살 수있을까? 일행들을 못만나면 바닷 물에 잠겨 죽을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공포심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를 태우러 온다는 배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잠시 생각 끝에 우측 방향으로 가보자 하고 일행들의 말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바짝 세우고 뛰기 시작했다. 한 참을 뛰다 보니 내 앞에 큰 개울이 있었으나 건널 생각을 감히 못하고 개울 따라 계속해서 뛰었다. 그러던 중 일행들의 말소리가 귀에 어렴풋이 들리는 것이다. 나는 그때 “이제 살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안내인 까지 19명 이였고, 전부 남자 어른들였으며 11살 된 아이는 나 하나 였다. 넓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아이가 안보이니 걱정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셨다. 그 중에서도 건장한 두 분이 나의 양쪽 겨드랑이를 높이 쳐들어 주어 개울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그분들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건넌 후에도 약속 장소까지 가는 데도 많은 시간이 지나 도착해 보니 이번에는 우리를 태우고 갈 배와 연락이 안된다는 것이다.

밤은 깊었고 안개로 한 치 앞도 안보이고 물은 많이 차 오르는데 우리가 탈출하는 과정에 총소리가 너무 많이 났기때문에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고, 19명 모두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이곳도 위험한 지역이니까 기다리다가 돌아 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안내인은 라이타로 불을 번쩍 번쩍하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고 또 이상한 새 소리로를 내며 신호를 하는 것 같다.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속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여러 척의 보트에서 동시에 전지 불을 우리에게 비추며 쉿! 쉿! 하며 조용히 보트에 빨리 올라타라는 것이 아닌가!

아! 이제야 우리가 살겠구나! 우리들을 태운 보트는 한참을 가더니 큰 목선 앞에 섰고 동쪽에서는 아침 해가 솟아 오른다. 우리 일행은 목선으로 배를 갈아 타게 되었고, 배에 오르고 보니 거기에는 십여명의 완전 무장한 국군 아저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을 보는 순간 너무나 반가웠다. 안내인 아저씨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우리가 무사히 이남으로 내려 가게 되면 총 7 발을 쏠 터이니 그 총소리를 들으면 안전하게 도착한 신호라고 어머니와 약속을 하셨다면서, 국군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어머니 사시는 곳을 향하여 일곱발의 총소리를 내는 것을 옆에서 들을 수가 있었다.

교동에서 인천행 배 타다

타고온 목선은 이제 강화도 교동면 선착장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는 각자가 남한 정보기관의 조사 받

아야 했다. 나에게도 질문을 하였으나 안내인의 설명으로 나는 조사를 마칠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내 옆에 아무도 없는 혼자가 되었다. 궁금하고 물어볼 것이 많은데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지금 터 어디를 어떻게 찾아 가야 우리식구들 을 만날 수있을까?” 생각을 하며 우선 많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가 보

았다. 인천으로 간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인천에 도착하면 서울도 갈 수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 난다. 서울에 가면 왕십리에 큰 누나가 서울사범학교에 유학할 때 사둔 집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말씀이셨다. 일단은 인천에 가는 배를 타기로 결정하고 남들 따라 배에 올랐다.

엔진으로 가는 배를 평생 처음 타보게되었다. 나는 전날부터 잔등에 지고 있던 보따리를 사람들이 앉아 있는 적당한 곳에다 내려 놓고 가벼운 몸으로 배 앞쪽으로 다가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다.

한참 후에 짐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 보더니 “너, 연안 대성여관집 아들 아니냐”고 물으면서, “너희 가족은 어디있냐? 왜 너 혼자냐? 어디를 가냐?”고 계속해도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끄덕이고있으 니까, “ 네가 왜 이렇게 됐냐?” 하시면서 듣기라도 하라는 것 같다.

뒤에 알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이모부 남동생의 부인이었다. 너희 이모부가 이제 이 배가 도착하는 강화섬 ‘건들’ 이라는 곳에서, 피난민 연락 소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알려 주신다. 그 이모부 가족은 황해도 옹진에 사셨고 그 가족들이 우리 집을 방문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모님 가족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가 ‘건들’ 선착장에 도착 했을 때 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드리고 배에서 내렸다.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이모님 식구를 찾으면 우리가족들의 소식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찾아 다녀 보았고, 마주 치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살펴 보며 다녔으나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집집마다 다니며 말을 못하니 대문 안으로 집안을 들여다 보며 찾아 보았으나 찾지를 못해 결국 다른 마을로 건너가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저녁 밥을 짓는지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 온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아직 물도 못 마시고 배도 많이 고프다. 더 어두어 지기 전에 이모님을 만나야 할덴데. 만약 오늘 아무도 찾지못하면 어떡하나 빨리 찾아 보자. 멀리 몇집이 보인다. 한 집으로 가서 들여다 보니 아무도 안 보이다. 다른 집은 좀 떨어져 있었다.

무작정 가가호호 방문하다 기적같이 이모를 찾다

자세히 보니 앞 마당에서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쓴 사람이 보인다. 부지런히 쫓아가서 보니 키질을 하고 있는 여자 분이다. 궁금해서 걸어가 조용히 옆에 서서 혹시 이모님이 아닐까? 하고 쳐다 보는 순간 눈이 서로 마주 쳤는데 바로 그분이 이모님이셨다.

이럴수가! 이모님도 어머니와 같이 안경을 끼고있었다. 이모님은 나를 보시자 마자 깜짝 놀라시면서 “아니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고 하시면서 믿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말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으니까 “네가 왜 이렇게 됐느냐”고 하시면서 “왜 말도 못하냐, 네 입은 왜 이러냐?”계속 물으신다. 한참 후에야 “그래 잘 찾아왔다. 고생 많이 했겠다”고 하시면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지쳐 있는 나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신다.

너의 아버지와 너의 형제들 모두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양도면이라는 곳에 함께 살고 계신다고 알려 주신다. 나는 이모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정말 잘 찾아 왔구나 생각하며 그동안 보고 싶었던 아버지와 형과 누나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그동안 이남으로 피난 나가 생사를 모르고 지내던 가족들을 다 찾게 되다

니…..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좋아 하실까?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좋다. 빨리 찾아가 만나 뵙고 싶다. 강화도에서 먼저 온 모든 가족을 다시 만나 남한의 가족들은 양도면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공부를 한 큰 누나가 양도면 사무소에 근무하며 살림을 도왔다. 집념이 강한 형은 마니산에서 많이 나는 감을 떼다가 팔고있었다.

전쟁중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라 보리밥을 먹었는데 점심에 먹을 솥에 넣어둔 형이나 누나 밥그릇에서 보리밥을 몰래 조금씩 덜어먹기도 했다. 누나는 내 입안의 혹을 보고 아는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의사는 입안을 자세히 드려다 보더니 주사기로 혹에서 검은 피를 뽑아냈다. 그리고 난 뒤 신기하게 혹은 사라지고 나는 해방되었다. 그리고 동광중학교에 들어갔다.

종전후 서울에서 재무부 문서전달부 되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우리 가족은 서울 하왕십리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중에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나가려면 도강증이 필요해 쉽지 않았다. 왕십리는 밭이 많았고 미군 군사시설도 여러 군데 있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나는 야간 중학교에 적을 두고 낮에 일을 시작했다.

일자리가 없던 터라 누이는 버스차장을 하다 나중에 경찰서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고 형은 카투사 교환병으로 군을 제대한 후 고향 분이 경영하는 당시 큰 안경점인 천보당에서 일했다.

황해도에서 싱가미싱 총판을 하던 아버지는 그냥 놀 수가 없어 우리집에 세들어 사는 교사부부의 권고로 학교 앞에서 학용품을 팔기도 했고 집을 처분해 이발소를 인수하기도 했으나 큰 재미를 못보신 것같다.

아버지는 재혼하셨는데 나는 북한 어머니 생각에 집에서 겉돌게 되었다.그래도 재무부 사환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생활비로 모두 드리고 교통비와 용돈만 받아 썼다.

다행히 이모부가 취직을 시켜주었다. 이모부는 배운 사람이었다. 재무무 이재국장의 부인과 이모가 정신여고 친구였기에 이모부는 총무과에서 일하고 있었고 처조카인 나를 사환으로 고용했다.

야간 중학생인 나는 문서전달부가 되었다. 전차를 타고 현재 청와대인 경무대를 비롯하여 정부 기관들을 찾아 다니며 서류를 전달하고 사인이 든 수령증을 받아오곤했다. 한번은 경무대에 문서배달 갔는데 화장실에 갖다온 뒤 봉투를 그냥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고 걱정에 혼이 날뻔했다. 급히 되돌아갔더니 다행히 봉투는 그래로 남아있었다.

어리지만 성실히 일한 탓인지 이재국 외환과에 스카웃되어 그곳에서 일했다. 나는 인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같다. 그곳에서 고대를 졸업한 정승진씨를 만났는데 나를 잘 보았는 지 동생처럼 잘 보살펴주었다. 먹을 것도 자주 사주고 심지어는 청운동 자신의 집에 기거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 분의 가르침으로 서류를 분류하는 법을 배웠고 프린터가 없던 당시 철필과 먹종이를 쓰는 등사기 사용법도 익혔다. 아버지의 영향 덕분인지 나는 글씨를 잘 썼고 기안과 등사를 잘해 인정받을 수있었다.

고등학교는 애초 을지로 6가에 있는 대경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년만에 그만두었다.그래도 그곳에서 주산과 경리를 조금 배웠다. 다시 야간인 인창고등학교를 다녔는데 der des dem하며 배운 독일어 문법이 생각난다..

낮에 일하고 교통이 불편한 당시 멀리 걸어서 학교에 또 가야하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있었다. 나는 인창고등학교 5회인데 요즘 한국 애국당 조원진대표가 인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고 이젠 명문 고등학교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관관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물론 야간이었다. 그러나 기초가 안된 내가 공부해서 행정이나 사법고시를 패스할 가능성이 없어 중도에 그만두어 졸업하지 못했다.

한진 조중훈사장을 알게되어 금고지기로

이재국 외환과에 있으면서 한진그룹 창업자인 조중훈 사장과 인연을 맺게되었다. 당시 한진상사는 미군속들의 이삿짐을 미국으로 옮겨주는 서비스업을 하고 있었는데 미국 달러를 만지게 되어 이재국 외환과로 자주 왔다.

그런 인연으로 이재국장이 추천하여 한진상사로 취직해 옮겼다. 자그마한 회사로 전무가 조중훈 사장의 형님. 경리부장이 조사장의 막내 처남이었다. 경리부장이 회사 실세였는데 그 분이 또 나를 잘 보아 금고지기로 현금 출납을 담당하게했다.

당시 회사들은 사채를 많이 썼는데 이자 4%와 수수료를 꼼꼼히 계산해서 정리하는 것이 내 업무의 하나였다. 사원들이 가불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와야되어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조중훈회장을 알게된 것이 내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그 즈음 내가 용케 자리를 잡은 것이다,

군에 가서는 카투사로 옮겼는데 한진상사의 초기 주요 비즈니스가 주한 미군과 그 군속들의 관련 물품이 나 이사짐을 도우는 것이 많았으므로 나한테도 좋은 경험이었다. 제대후 다시 명문대출신들이 포진해 있는 한진상사로 복귀했는데 조중훈회장의 신임을 얻어 한진그룹 성장에 일조했고 이사로 승진해 직장생활을 잘 했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 강화도와 서울에서의 36 년 간에 걸친 한국에서 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이제는 북한에 살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사를 알고, 찾아 만나기 위해, 그 일이 가능한 나라 캐나다로 아내와 4명의 딸과 함께 이

민을 떠나 밴쿠버에 정착 하게 되었다. 1987 년 11 월 2일부터 2006 년 1월28일까지 살다가 그 후에는 2006 년 1월 29 일부터 현재까지 일조량이 가장 많고,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 캘거리에 와서 살고 있다. (계속)

편집자주 : 송영석님의 자서전을 모두 보기 원하시는 분은 songy9221@gmail.com으로 연락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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