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나 화성과 같은 태양계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하여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행성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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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수학자요, 천문학자였고,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은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1571-1630)는 독일 베일 지방의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래 중세의 기사들 중에서는 케플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귀족들과 사업가들도 많았다.
병약한 어린아이, 케플러
그의 할아버지 세발드 케플러는 사업에 성공을 거둔 베일의 쉬바리아라는 마을의 시장이었는데, 요한 케플러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이미 가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케플러는 조산아(早産兒)로 태어났을 만큼 처음부터 매우 허약한 아이였다. 그는 고열과 위장병 그리고 부스럼과 나쁜 시력 때문에 시달렸으며, 천연두에 걸려 간신히 생명을 건졌을 정도로 여러 질병으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로부터 아주 철저한 개신교 신앙을 가진 집안이었는데,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이 대부분 카톨릭 사회였던 것에 비해 개신교 신앙을 지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은 허약하고 어린 케플러를 지탱해 주는 지주가 되었으며, 위대한 천문학자가 된 훗날까지 그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었다.
1577년 어느 날, 그의 모친은 하늘에 큰 빛을 뿌리는 굉장한 혜성(彗星)을 어린 케플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3년 후, 그의 부친은 그를 데리고 나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月蝕)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어린 시절 일찍부터 하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케플러는 결국 그것이 천체에 대한 평생의 관심이 되어버렸다.
루터파 출신의 목사가 되려던 아이, 케플러
작은 루터교 집단에 속한 가족 덕분으로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신앙에 익숙한 케플러는 라틴어 학교를 졸업한 후 개신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열세 살이 되던 해 경쟁이 아주 치열한 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 후 3년 동안, 반복되는 질병과 고된 학업 그리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589년 가을, 케플러는 독일 튀빙겐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대학은 당시 개신교 루터파 신학 연구의 유명한 중심지로 과감하고 사색적 분위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폭 넓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신학 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케플러는 항상 그를 따라다니는 두통과 발진 그리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열병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 인내하며 학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천문학과의 조우- 마에스트린과의 만남
여기서 케플러는 그의 삶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다 준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유럽 전역에서 크게 존경받는 수학과 천문학의 교수인 미카엘 마에스트린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마에스트린 교수는 지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어려운 이 이론을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몇몇 유능한 학생들에게만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젊은 케플러는 그의 설명에 매혹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그가 관심을 갖고 있던 천체와 별들의 운행에 관한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이렇게 케플러는 과학에 대한 공부와 목회를 위한 신학을 한동안 병행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학 공부는 1594년 초 카톨릭의 영향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의 한 신학교에 수학 교사로 부임하면서 중단되게 된다. 그는 그곳 스티리아에 있는 그라츠대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지방의 수학자(일종의 지방 자치 측량사)와 달력, 연감의 제작자로도 일을 하게 된다.
당시의 점성 달력은 달의 위상과 차고 어그러짐을 나타낼 뿐 아니라 날씨와 추수의 시기 그리고 국가의 운명과 전쟁의 승패까지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천문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당시 귀족들도 점성술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달력을 다루는 사람은 당시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케플러가 바로 그 방면의 전문가였던 셈이다.
농민들의 봉기, 터키인의 침공, 그리고 유례없는 혹독한 겨울 추위 등 1595년에 대한 케플러의 예측들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케플러는 이때 최초의 저서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1596)를 낸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에 대한 견해와 기독교와 피타고라스적 종교성의 융합을 시도한 책이었다. 케플러가 아직 학문적으로 미숙할 때 나온 천문학서(書)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케플러는 7살 연상이었던 위대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갈릴레오는 감사의 편지로 감동적인 우정을 나누었던 흔적(1597년 8월 케플러의 책을 받고 갈릴레오가 써준 편지글)이 남아있다.
이후 5년여 동안 본의 아니게 케플러는 천체 예측가(일명 점성술사)로서 귀족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천문학자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는 점성술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따라서 케플러는 점성술사라는 명칭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귀족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당시 천체의 움직임이 어떤 측면에서는 지구상의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은 “하늘의 광명이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룬다” 하셨지 않은가. 이것은 변질된 점성술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단지 전문가로서의 천문학적 자료와 주변 정황 분석에 따른 통찰력이 맞아떨어진 것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케플러는 점성술을 가리켜 ‘고귀하고 합리적인 모체인 천문학에서 태어난 어리석은 딸’과 같은 존재라고 혹평하였다.
이런 일들은 모두 가난한 그가 살아가기 위한 작은 방편이었다. 달력제작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생활인으로서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한다. 이후 케플러는 좀 더 자신의 학문적 성숙과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당시 합스부르크의 수도 프라하에서 루돌프 2세의 궁정 수학자로 일하던 티코 브라헤와의 만남이었다.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와의 만남
1600년, 케플러는 덴마크의 유명한 크리스천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와 만나며 본격적인 천문학자로서의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1599년,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케플러도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대학에서 추방당해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 이때 브라헤를 만났던 것이다. 브라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별들이 하늘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여러 새로운 별들을 발견하기도 한 당시의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하지만 브라헤도 물론 시대적 한계를 가진 과학자였다.
브라헤는 모든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돌며 태양은 다시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금의 천문학 지식으로 보면 틀린 이론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세련된 이론이었다. 비록 브라헤와 케플러는 천문학에 관한 의견에 있어 다른 점이 많았고 함께 일한 기간이 10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브라헤에 대한 케플러의 존경심은 브라헤가 죽은 이후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나와 브라헤를 묶어 주셨고, 아주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나로 하여금 그로부터 끊어지지 않게 해주셨다.”
브라헤는 임종하면서 30세 된 이 청년 과학자에게 자신의 천문학적 자료를 모두 인계하고 자신이 연구해 온 일들을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한다. 브라헤가 임종하자 덴마크 국왕 루돌프 황제는 케플러를 브라헤의 후임인 황제의 수학 담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케플러의 연구에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케플러의 “케플러 법칙” 발견
화성에 대한 브라헤의 당시 관측 자료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케플러는 드디어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을 완성하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케플러는 화성 즉 “마르스(Mars)와 치른 개인적인 싸움의 승리”라고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화성이라는 뜻인 “마르스”가 곧 로마의 군신(軍神)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유머러스하게 말한 것이었다.
화성에 대한 관측으로부터 그는 “행성의 궤도는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고 또 다른 하나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의 궤도이다”라는 케플러의 제 1법칙을 완성하였다. 동시에 “태양을 초점으로 한 행성의 움직임은 같은 시간에 동일한 면적 궤도를 그린다”는 케플러의 제 2 법칙도 발견하였다. 이것은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행성의 속도가 빨라지며 태양과 멀어지면 행성의 속도는 느려진다”고 하는 아주 중요한 법칙이었다.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꾸준하고 구체적인 천체 관측도 없이 17세기 초에 발견했다는 것은 케플러가 대단히 치밀하고 수학에 아주 능한 천재 과학자였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 법칙들은 1609년 케플러의 저서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을 통해 알려졌다. 케플러의 치밀함은 이미 그가 1604년, 천문학과 무관한 눈동자를 통해 눈 안으로 들어온 빛이 수정체에 의해 모아지고 망막에 거꾸로 된 상을 맺히게 한다는 망막상(retinal image) 이론을 발표한 최초 인물이라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 3 법칙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은 지구의 1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행성의 공전 궤도의 평균 반지름의 세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칙은 1619년, 그의 마지막 저서 『우주의 조화(De harmonice mundi)』를 낼 때에 맞추어 발견되었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은 그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영국 왕립협회에 제출할 때 “케플러가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수학적 증명”이라고 자신의 법칙을 소개하고 있다. 뉴턴은 케플러의 제3법칙으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케플러는 결국 당시 과학계를 뒤흔들어놓고 있던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최초로 그것을 수학적으로 자세히 밝힌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케플러의 신앙
이 위대한 천문학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여러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가 나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우연히 내가 발견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것이 참이라면 내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케플러는 그의 책 『우주의 신비』에서 고백하고 있다.
또한 케플러는 천체의 운행에 대한 위대한 법칙을 발견한 후 은사인 마에스트린 교수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자연이라는 책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저는 제가 발견한 이 사실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저는 한때 신학자가 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문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편 19:1).
시편의 이 말씀은 케플러의 천문학 연구에 있어 일생의 중심 사상이었다. 그는 하늘에는 눈에 보이는 질서가 있다는 신념이 확고하였다. 그 질서가 창조주 하나님이 베푸신 질서임은 물론이다. 그는 또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 연대에 대한 문제에도 노력을 기울여, 히브리와 바벨론 그리고 로마와 헬라의 달력들을 조사한 끝에 라틴 달력에 오류가 있음을 밝혀내고, 예수님께서 실제로는 기원 전 4년에 탄생하였음을 주장했다. 이것은 결국 누가복음의 기록이 정확함을 변호하는 논문이었다.
예수님의 탄생 연대 문제는 현재에도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기원 전 4년경에 탄생하셨다는 것이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1618년 케플러는 “우주의 조화”라는 논문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을 그는 “신성한 설교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이라 고백하고 있다.
특히 “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 합니다”라고 한 유명한 말은 그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많은 과학자들의 신앙고백이 되고 있다.
아마도 최초의 과학 소설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달의 문』이라는 과학 소설을 쓰기도 한 케플러는,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우리들 천문학자는 우리들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의 종들일 뿐입니다.”
이것도 그의 유명한 신앙 고백 가운데 하나였다. 병약한 학자로서 끊임없는 개인적 불행과 가난으로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물론 이런 성품은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케플러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오느냐고 묻자 그는 확신 있는 어조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오직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캘거리대학의 역사철학 교수인 오슬로(M. Osler)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케플러의 주장은 신의 섭리에 대한 루터교의 신학 개념이 기본적인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 위대한 천문학자는 진정한 자신의 피난처와 위안을 찾았다. 1630년 11월 15일, 드디어 요한 케플러는 영원한 천국으로 갔다. 레겐스부르그 성벽 외곽의 성 베드로 교회에 있는 그의 작은 묘비에는 그가 임종하기 수개월 전에 스스로 쓴 비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는 천체를 측량하곤 하였네,
이제 나는 땅의 그림자들을 측량하려 하네.
내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지만,
내 육신의 그림자는 여기 누워 있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