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대사 캘거리방문

캘거리 한인 역사는 1965년 9월에 김창영 박사님이 캘거리 대학에 물리학 교수로 부임 하면서 가족 (부인 염순복, 장남 Isaac 인식,  장녀 Irene 인선,  차녀 Diana 인옥 ) 5 명이 정착 하면서 시작 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1966년 부터 문호 개방 정책을 세워 유색 인종에 대해서도 이민을 받아 들이면서 한국 사람들도 한두명씩 오기 시작 했고 독일 광부로 갔던 사람들과 간호사로 갔던 사람들이 오기 시작 했다.  이 당시 캐나다에 오는 사람들은 돈도 없고 캐나다에 대한 정보도 없이 왔기 때문에 정착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김창영 박사님이 새로 이민온 사람들이 정착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김박사님 집은 옛날의 한국의 사랑방 같이 한인 교민 들에게 항상 문이 열려 있었다. 특히 주말에는 전 교민이 김박사님 댁에 모여서 캐나다 생활에 대한 정보도 교환 하고 새로운 이민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풀었다. 이렇게 김박사님댁을 중심이 되어 가족과 같은 분위기로 지냈기 때문에 한인회를 조직 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1968년 8월 24일에 캐나다 초대 대사이신 백선엽 대사님께서 영사 한분과 같이 캘거리를 방문 하셨다. 이틀 동안 계시면서 교민들과 같이 지내셨다. 백선엽 대사님을 모시고 다 같이 모일때도 김박사님 댁에서 모였다. 이때 백선엽 대사님 께서 한인회를 만들 것을 제안 하셨다. 우리들은 한인회가 왜 필요 하냐고 했다. 교민수도30 (아이들 포함)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김박사님이 한인들의 어려움을 도와 주시고 있어서 한인회 없이도 재미있게 잘 지내는대 번거럽게 한인회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사관과 캘거리 교민들과 연락 할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하니까 힌인회가 필요 하다고 해서 한인회를 조직 하게 되었다.

선거하고 투표하고  할것도 없이 김창영 박사님을 만장 일치로 초대 한인 회장으로 선출 하였다. 회장을 도와 심부름 할 사람이 필요 하다고 해서 최병기가 총무로 선출 됬다. 이렇게 해서 캘거리에 한인회가 조직 되었다. 그런데 김박사님이 1969년 안식년 (Sabbatical Holiday) 해가 되어서  일년동안 미국에 가 게시게 되었다. 1969년도에 일할 한인 회장을 선출 해야 했다. 그래서1968년도 12월에 처음으로 한인회 Party겸 총회를 개최 하였다. 총회에서 1969년도에 일할2대 한인회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 하였다. 2대 회장에 양재설 부회장에 김호식을 선출 하였고 총무는 회장이 문형린을 임명 하였다. 2대 한인회에서 한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69년 1월달에 선명회 합창단이 북미주 순회 공을 했는데 캘거리 까지 와서Jubilee Auditorium 에서 공연을 하였다. 공연을 관람한 캐나디언 의사가 합창단원 전원 ( 합창 단원 50명과 인솔자 5명 )을 자기집에 초대를 한일이 있다. 합창 단원 들이 말 하기를 한국을 떠나 미국을 거처 캘거리 까지 오는 동안 두달이 지났는데 한국 음식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다. 캐나디언 의사가 수소문을 해서 한인회 회장인 양재설에게 연락을 했고 한인회 회장은 각가정에 전화로 연락을 하고  김치 깍두기가 있는 집은 김치 깍두기를 내고 김치 깍두기가 없는집은   밥과 불고기를 만들라고 해서 부회장인 김호식 과 회장인 양재설은 집집을 다니면서 준비한 깁치 깍두기와 밥과 불고기를 거두워서 캐나디언 의사집에 가서 선명회 합창단원을 대접한 일이 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나 캐나다에 작은 도시에는  한국 음식점이 없었다.

둘째: 한인회밤을 1969년 6월에 가젔다. 한인회밤을 하게된 동기가 있다. 우리 가족이  1968년 4월 5일 식목일날 캘거리에 도착 했다. 나무를 심으로 온것이 아니고 이민을 온 것이다. 우리 가족을 Canada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온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등 하며 Korea가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되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 승만 리가 있는 나라, 하는 사람도 만나 보았고 전쟁을한 나라 라고 말 하는 사람도 만났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많이 발전해서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 졌지만 그때만 해도 Korea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이렇게 Korea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Korea를 알릴수 있을가 생각 한것이 씨가되어  처음으로 한인의 밤 (Korean Night) 을 갖게 된 것이다. 한인의 밤을 통해서 한국 음식과 한국의 문화를 알리려고 시도 한 겄이다. 장소는 1311-4st. SW. 에 있는 First Baptist Church를 빌려 사용 하기로 했다. 방법은 교민 한사람이 Canadian 한사람을 초청 해서 한국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식사후에는 한국을 소개 하는 홍보 영화를 관람 했다. 홍보 영화는 뱅쿠버에 있는 영사관에서 빌려왔다. 사회는 문형린 한인회 총무가 유창한 영어로 잘 진행 하였다. 특별 손님으로 John. M. Rockingham 장군을 초대 했다. Rockingham 장군은 1950년 6.25 전쟁 당시 캐나다군 일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가평전쟁에 참전 하신 장군 이시다. 전쟁후에는 캐나다에 돌아와서 캐나다군 총사령관 으로 있다가 1966년 전역을 하시고 1969년에 캘가리에 잠간 계실때였다. 나는 Rockingham 장군과 전화로 한인회 밤에 대해 말씀드리고 참석해 주시면 저희들에게 큰 영광이 되겠다고 말씀 드렸다. 내 설명을 들으시고 캘가리에 한국 사람이 사는지 몰랐다고 하시면서 토론토에는 한국 사람이있는것을 알고 있다고 하셨다.

장소와 날자, 시간을 알려주면 참석 한다고 약속은 할수 없지만 참석 하도록 노력 하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 참석 하시겠다는 반 이상의 약속을 받고 나는 너무 기뻤다. 그이후에 또 한번 전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화 중에 김군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김군은 Rockingham 장군의 하우스 보이 었다. 장군님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서울대학 철학과를 나와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하셨다. 지금도 매년 생일날 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빠지지 않고 안부편지를 보낸다고 하시면서 기뻐 하셨다.

Rockingham 장군 같은 분이 마침 캘가리에 계셨고 한인회밤 행사에 참석해 주셔서  초라하게 치룰번한 한인회밤 행사를 더욱 빛나게 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Rockingham 장군에게 한 말씀 하시라고 했다. 캐나다가 춥다 춥다 하는데 한국의 전선은 캐나다 보다더 추웠던 겄으로 기억 한다고 하시고 내가 한국을 떠날때는 페허가 된것을 보고 떠났는데 그동안 이렇게 많이 발전 했냐고 하시면서 기회가 되면 발전한 한국을 다시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이후 한국을 다녀오셨는지 모르지만 1987년  뱅쿠버 섬에서 여생을 보내시다가 타계 하셨다고 신문에 보도 되었다. 한인회 밤을 처음 계획할때는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막연 했는데 사작 하고보니 모든일을 미리 준비한것 처럼 필요에 따라 적임자들이 나타서 내일같이 도와 주어서 생각 보다 더 잘 할수 있게된것을 감사 한다

셌째: 1969년 7월에 엗먼튼에 사는 교민들과 캘거리에 사는 교민들이 에드몬튼과 캘거리 중간 지점인  Red Deer 근처에 있는 Gull Lake 에서 다 같이 모여 합동 피크닉을 하였다. 남자들은 야구 시합도 하고 준비해온 음식도 서로 나누어 먹고 교제도 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1988년2월에 동계 올림픽이 캘가리에서 있었다. 캘가리 한인회는 올림픽 후원회를 조직 하고 위원장에 김창영 박사님을 선출했다.  올림픽 위원회가 한 일은 선수들 환영,통역, 운전등으로 도왔고 경기 중에는 선수들이 실력을 최대한 발휘 할수 있도록  응원으로 도움을 주었다.  마침 1988년도 9월에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 하게 되었다. 하계 올림픽 대표단이 동계 올림픽을 관람 하기 위해서  캘가리를 방문했는데 두 올림픽 대표단을 맞날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초대 한인 회장 ( 1968년도 ) 에 김창영 박사.  2대 한인 회장 ( 1969년도 ) 에 양재설. 3 대 한인 회장 (1970년도 ) 에 이재호. ……..이렇게 해서 현재42대 한인 회장 ( 2017년도 ) 에 김수근 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인회 다음으로 세워진 단체는 한인 교회다. 1972년 10월 6일 문재린 목사님과 문형린 두분이 양재설 집을 방문 하셨다. 방문 목적은 캘거리에 한인 교회를 시작 하는데 도와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다. 이일을 당장 시작 하자고 해서 주변에 사는 한인 교민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최병기만 참석 했다. 우리들 ( 문재린 목사, 문형린, 양재설, 정광희 ( 양재설의 처) 최병기 ) 5명이 둘러 앉아 한인 교회 시작을 위한 준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72년 10월 15일에 캘거리 전 교민을 초청 해서  Heritage Drive에 있는  St. Andrew United Church 에서 창립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 했다. 이사실을 박은현 4대 한인 회장에게 알리고 전 교민에게 전화로 초대 하는일을 한인 회장이 맡기로 했다. 한인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참석 했다. 100 여명 (아이들 포함) 정도 참석 한 것으로 추산 한다.

문재린 목사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이라 를 봉독 하시고 말씀을 전 하셨다. 설교 말씀을 요약 하면  500여년전 세계적으로 두개의 큰 이민이 있었다. 하나는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북미로 이민 한 것이다. 이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다른 하나는 스페인에서 금을 찾기 위해서 남미로 이민 한 것이다. 500년이지난 지금 두 이민을 비교해 보면 종교의 자유를 찾이서 북미로 이민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룩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금을 찾아 남미로 이민한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로 전락 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사는 우리 교민들도 돈을 버는데 온정성을 다하지 말고 청교도 들과 같이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캐나다 땅에서 큰 민족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설교를 마치시고 문재린 목사님이 회중 에게 물었다. 캘거리에 한인 교회를 세우는 것을 좋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100% 손을 들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왜 기적이 일어 났다고 표현 했냐 하면 그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문재린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모두 손을든 것이다.

나는 몇일 있다가 떠날 사람이다. 교회가 있을려면 교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 한데 5명을 운영 위원으로 뽑고 그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하자고 해서 5명을 선출 했다. 선출된 사람은 1. 김병옥 2. 라병학, 3. 문형린. 4. 박은현. 5. 양재설. 이다. 교민들이 다 돌아간후에 문목사님이 운영위원 5명을 소집 하고 운영 위원장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 하자고 해서 투표결과 양재설이 선출 되었다. 교회 명칭을 무엇으로 하면 좋겠냐고 문재린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다.  문 목사님이 말씀 하시를 그냥 캘거리 한인교회라고 하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캘거리 한인 교회가 시작 되었다. 그이후 1983년 1월 14일 캐나다 장노교단에 등록 하고  캘거리 한인 교회를 캘거리 한인 장로 교회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운영 위원들은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고 교회 운영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일 학교도 시작 했다. 1973년 4월 성백희 P.B.I. (Preirie Bible Institution)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성백희 신학생 에게 한인교회를 시작 하게된 이야기를 하고  주일날 설교를 맡아 줄수 있겠냐고 부탁 했다.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될것이라고 하면서  허락을 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매주일은 할수 없고 한달에 한두번은 할수 있겠다고 해서 성백희 신학생이 한달에 한두번씩 주일날 설교를 하기 시작 했다. 이렇게 해서 그런 대로 교회 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일 예배를 막 시작 하는데 St. Andrew United Church 대표라는분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그분은 나에게 보여줄것이 있다면서 따라 오라고 했다. 교회당 복도 위에 높은데 있는 유리창이 깨진 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교회를 지은지 18년이 되였는데  이런일은 전에는 한번도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사용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안쪽 복도에는 주먹보다 더 큰 돌이 떨어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일 학교 비품들을 사용한뒤에 제자리에 갔다놓지 않고 더러는 없어 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를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한마디 말을 못하고 미안 합니다. 상의해서 나가겠다고 했다. 예배후에 운영 위원회를 소집 하고 다른 교회로 이전 해야겠다고 설명을 했다. 우리들은 다른 교회를 찾기 시작 했다. 몇개의 교회를 돌아보고  Rosedale United Church가  우리에게 가장 적합 하다고 결정 하고 사용 허가를 받았다. 1973년 7월 29일 교회를 Rosedale United Church로 이전 하였다

1973년 10월 추수감사 주일 예배를 에드몬튼 한인 교회를 초청 해서 합동 예배를 들이기로 하였다. 설교는 에드몬튼 교회 다님 목사님 이신 김형도 목사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한인교회를 시작한후 처음으로 한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은혜가 넘첬다. 예배 후에는 갤거리 교회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성도의 교재를 하였다.

  초대 운영 위원장에 양재설 1972 년10월 – 1974년 3월,  2대 운영 위원장에 국응도 1974년 4월 – 1975년 2월,  3대 운영위원장에 김용미 1975년 2월 – 1976년 2월 까지 교역자 없이 교회를 운영 하였다. 성백희 신학생이 1975년 4월P.B.I. (Preirie Bible Institution)신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 3월 부터 1981년 7월 까지 초대 교역자로 시무 하기 시작 해서 현재 7대 교역자 최창선 목사 2002년 7월 – 2017년 4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이민오는 사람이 증가 하면서 교회 수도 증가 하게 되었다. 2017년 현재  캘거리에 31개의 한인교회가 있고 천주교회가 하나 그리고 불교의 서래사가 하나 있다.

참고:  문재린 목사님은 76세 라고 하셨는데 연세에 비해 건강 하셨다.  1928년에 토론토에 있는 임마누엘 신학교에 유학 하시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한국 사람으로는 캐나다 1호 유학생 이라고 하셨다. 평생을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 하시고 토론토에 사는 막내 아드님 문영환 집에 오셨다가 캘가리에 한인 교회가 없다는 말을 들으시고 캘가리에 한인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고자 오셨다고 하셨다.

2017년 4월 양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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