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한 역에서 만난 여동생 갑자기 기절-송영석의 천로역정 (3)

우황청심환 지니고 북한 입국

-첫번째 북한 방문의 날! Canada 에 이민을 가면 북한을 방문하여 가족을 찾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Vancouver 에 정착 한지도 벌써 3년 이란 세월이 흘러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쉽지 않은 여러 과정을 통하여 드디어 1991 년 3월말에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북한 출신 많은 이산 가족 중에서 모집된 사람들과 함께 중국 북경에 모여 전세기 편으로 평양에 들어 가는 날이 밝았다.

김일성 생일 축하공연 참관단 이라는 명목으로 금강산 외 여러 곳의 관광과 더불어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게해준다는 Program의 일부다. 드디어 40년만에 꿈에도 그립던 고향을 찾아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난다는 들뜬 마음으로북경 공항에서 북한 국적기에 올라 자리에 앉고 보니 참으로 긴 세월 동안에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이 현실이 꿈만 같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찹찹하게 떠 오른다. 한편 그래도 40 년만에 혈육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개무량(感槪無量)하다.

여자 승무원이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여러나라에서 오신 동포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네까? 이 비행기는 우리 혁명의 도시 평양을 향해 곧 뜨갔습네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라갔습네다.” 이륙과 동시에 고성으로 울려 퍼지는 노래는 40 년 전에 귀가 닳도록 듣던 김일성의 노래가 아닌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으며 갑자기 옛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 거린다. 

내가 이제 잘못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행들의 얼굴을 쳐다 보니 하나 같이 얼어 붙은 표정들이다. 그러나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운명에 맡기자!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행기가 이제 고도를 잡으니 노래는 멈추고 승무원들이 간식을 나눠 주고 간다. 삶은 겨란 2개와 작은 신문지로 조그맣게 싼 소금이였다. 

겨우 45 분만에 평양공항에 도착 하고 보니 공항 건물 전면에는, “해외 동포 조국 방문단을 열렬히 환영 합네다” 라고 크게 프랑카드가 걸려 있다. 입국장에서 한국여권 때문에 가슴졸여 입국장에 들어서니 줄은 VIP 줄과 또한 줄은 우리 일행 100 여명이 길게 늘어선 줄이다. 입국 수속이 진행되니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여권을 꺼내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무래도 한국여권을 가지고 온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인다.

입국수속 담당자 앞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설 때마다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일어 날까? 걱정이 되어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정리를 해보며 모든 일이 잘 되기 만을 빌뿐이다. 내 차례가 되어 앞으로 다가 가니 내가 선 천장부터 뒷쪽 면 발끝 아래 까지 거울로 되어 있었고 그러니까 담당 자는 내 머리로부터 앞 과 뒷 모습 전체와 발 뒷꿈치 까지 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담당자를 위로 처다 보니 코와 눈 그리고 군모만 겨우 눈에 들어온다. 여권을 높이 들어 올려 놓으니 아니나 다를까 여권을 보자 마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따위를 가지고 왔냐고 고함을 지르며 집어던지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조그만 공항 청사가 시끄러워 지고 입국 수속이 잠시 정지되는 사고가 발생 하게 되었다.

제복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하며 나에게 여러가지 심문을 하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일행 모두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청사 밖으로 나올 수 가 있었다. “해외 동포 조국 방문단을 열렬히 환영합네다”라고 쓰여진 여러 대의 리무진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승차한 다음에는 교통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평양시내에 있는, 장광산 려관 앞에 도착하였다. 방을 배정 받은 다음에는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올라와 창밖을 내려다 보니 차량도 별로 없었고 길 거리도 조용하기만 하다. 방에는 칼라TV 가 있었고 라디오도 있었으나 채널은 평양 방송에만 고정되어 있었으며, 역시 내가 들어서 알고 있는 그대로 였다.

 일찍 잠자리에 누어 여기까지 오게된 과정을 생각하며 언제나 가족들을 만나게 해 줄려나 궁금하여 이생각 저생각을 하다가 잠을 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밤 12시30분에 호텔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 “누구십니까?” 하니 “혹 캐나다에서 오신 송영석 선생이십네까?”하고 묻는다. 나는 깜짝놀라 아니 이 밤에 누가 나를 찾지?“네 맞습니다. 들어 오십쇼”하고 문을 열어 주려고 하는데 “아니 괜찮습네다”하고는 들어 오지않고 하는 이야기가 전충림 선생께서 모시고 오라고 해서 왔습네다. 현관 앞에 차에서 기다리겠습네다. 하고는 가는 것이다.

이 밤에 나를 불러 만나 자고 한 분은 바로 토론토에 사는 분이셨고, 이번에 평양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수속을 맡아서 해준 분이다. 그런데 이 밤중에 왜 나를 보자고 할까? 생각해 보니 수속 중에 그분과 통화한 내용이 생각 난다. 소련 벌목공으로 가있는 남동생 걱정을 많이 했더니 그 문제인 것같다. 북에 들어가면 믿을만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나는 정장으로 차려 입고 부지런히 내려가 보니 큰 별이 하나 그려져 있는 벤츠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뒤에 타고 가는중에 캄캄한 평양 시내를 통과 한것 같은데 한참 후에는 산으로 올라 간다. 가다 보니 초소에서 총을 든 인민군 2명이 앞에서 차를 세우고 전지불로 비추더니 나에 대해 물어 보는 것같다. 운전수가 태양절에 참가하러 캐나다에서 오신 손님이라고 하니까 바로 통과를 시킨다.

벤츠타고 북한 고위간부 만나 은밀한 노래방

그리고 십여분 지나 초대소 건물 앞에 세운다. 현관문을 열어주며 가슴에 복무원이라고 명찰을 단 젊은 여성이 안내해 주어 따라가 보니 전충림씨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이제 좀 있으면 간부 세 사람이 오게 돼 있다고 하면서, 어제 평양 공항에서의 문제는 본인이 해결했노라고 하신다.

밤 1시가 지났을 때에 정장을 한 세 사람이 함께 들어온다. 전충림씨가 소개해 주어 잠시 서서 인사를 나누면서 가지고 온 선물을 전해 주니 고맙다고들 한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복무원이 술상을 차려 주어 좋은 분위기 속에서 북한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부장 출신에게는 호칭을 편하게 형님으로 하고 소련과 항가리 유학파 출신 차관보급에게는 아우님으로 불렀드니 다들 만족해 한다.

분위기 좋아져 소련 벌목공 동생 귀국 부탁 이제 기분이 좋아 졌는지 내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어른이 나에게 아우님 노래 한번 불러 보라우 한다. 아닙니다 형님이 먼저 부르셔야지요. 하니, “아라서 내레 부르가서” 하더니 자기네 수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잘도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마자 바로 형님 앵콜입니다. 재청입니다 하니 한번 더 하라우? 이번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을 2 절까지 일본어로 부른다. 이번에는 노래가 끝나자마 자 박수를 쳐주고 아니 이 노래는 남조선 노래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시냐고 하니 대답이 걸작이다.

“아 일본 아새끼들은 거저 조선 사람들은 혁명가밖에 모른다고 해서 내레 배왔디”라고 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우도 한번 불러 보라우 한다. “그럼 제가 좋아 하는 노래 하나 부르겠습니다”하고는 옛날 한국에 살 때에 내 주제가 였던 ‘사랑의 미로’를 2절 까지 불렀는데 박수가 나오길래 “3 절이 또 있시요!”라며 평양 사투리로 말하고, 계속 3절 까지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나더니 하는 말이 “기레 말야 이 노래는 거져 우리 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일) 동지께서 좋아 하시는 노래야.”라고 한다.

나는 조금후에 분위기를 바꿔 “소련에 벌목공으로 가 있는 동생에 대해 어려운 부탁 좀 드리려고 합니다”하니 무슨 일인지 말 하라고 한다. 평안북도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돌아 오게해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않고 꼭보답 하겠습니다 하니, 바로 대답이 나온다. “아라서 내레 다음달(5월)에 나오게 해 주가서.” 대답이 참 시원 시원하다.

시계를 보니 밤 3시다. 내일 고려호텔에서 저녁 식사 초대를 약속하고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 일행들에게 북한에 체재하는 기간 동안 주의할 점에대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첫번째 방문할 곳을 담당 안내원의 소개로 듣게되었다. 우리 조국을 방문하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반드시 이곳을 먼저 관람을 해야 된다는 곳이다. 그네들의 위대한 수령인 김일성이 출생했다는 일명 ‘고향의 집’ 앞에 도착해 수령이 성장한 배경을 듣는 일이다.

평양시내 관광 중에는 지하철도 타 보았고,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5.1 능라 경기장을 비롯해, 거대한 김일성 동상앞에 세우고 는 동상에 절을 하라는데 나는 절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남들 절할 때 나는 구두끈을 매었다.

그리고 다시 이동하여 170m 나 된다는 주체탑도 올라가 보게 하고, 김일성 종합대학교에 가서는 김정일이앉아서 공부했다 는 책상과 의자를 구경 시켜 준다. 열사능, 전쟁기념관, 김일성생일 70 세를 기념해서 세웠다는 개선문, 전쟁중에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을밀대(乙密臺), 그리고 김일성 광장, 인민학습당 방문 등 3 박 4일 동안의 의무관광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기차타고 평북 작은 역서 여동생 만나다

“오늘은 송선생 여동생을만나러 가는 날입네다!”. 내가 평양을 떠 날때까지 나를 감시할 감시원이 찾아와 송선생의 가족 방문이 오늘결 정 되였다고 알려준다. 이제 평양 기차역으로 가자고 한다. 감시원을 따라 신의주 방향으로 간다는 기차에 함께 올랐다. 창밖을 내다 보아도 풍요로운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산천 마을 모든 것이 가난에 쪼들여 보인다.

함께 타고 가는 기차칸의 북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니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제 곧 만나게될 동생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아내는 내 모습을 쳐다 보면서 걱정이 되는지 우황청심환을 내게 주면서 꼭꼭 씹어 먹으라고 한다. 3 시간 동안 가다 보니 평안북도 어느 조그마한 역에 도착 하게 되었다.

창밖을 유심히 내다보니 풀렛홈까지 나와 있는 동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7살때 헤어 졌던 여동생이 눈에 들어온다. 감시원과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정심아!”하며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고 정신없이 울며 불며 오열하는 가운데 여동생이 갑자기 기절을 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아내는 가지고 있던 우황청심환을 동생의 입 속으로 넣어 준다.

동생은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더니 맨 먼저 어머니의 소식 부터 알려준다. 내가 이남으로 내려가고 45세 되시던 1958년에 반동 가족으로 몰려 인민 재판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현장에서 비명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불쌍한 내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다. 엄마 생각에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평양서 부터 따라온 감시원은 나에게다 가와 역전 앞으로 나가면 군당 책임 비서가 보내준 차량이 있으니 이제 동생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 차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동생집에 도착해 보니 나를 만나기 위해 어제 밤에 멀리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4살 때 헤어졌던 여동생과 매제와 조카, 그리고 소련에 가 있는 동생의 가족들을 보았다.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모두들 나를 쳐다 보며 울기만 하는 동생들과 가족들! ,6.25 전쟁으로 평화스럽던 우리 집안이 피 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죽이고 죽는 참혹한 전쟁중에 막내 동생은 결국 병들어 죽었다. 비참하게 망가져 버린 우리 가족들의 이 기막힌 현실에 내 마음은 아프고 슬프기만 하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소련 벌목공으로 고생하고있는 남동생을 그 가족에게 다시 돌아오게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다음달 남동생을 평양에서 만나게 해줄 수있다는 그들의 말에 다시 희망을 갖고 평양을 떠나올 수있었다. 그 뒤 소련의 동생을 만날 수있을거란 큰 기대를 걸고 다시 똑같은 수속을 밟아 6월에 평양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두달만에 다시 찾아간 북한!

지난 4월에 평양 초대소(招待所)에서 만났던 북한 조직원들의 약속대로 소련에서 동생을 다음 달 5월에 나오게 해준다고 했으니, 나는 그 약속을 믿고 6월에 는 Canada 여권으로 만들어 두번째 방문했던 것이다. 다시 평양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니 나를 찾는 음성이 들린다. “캐나다에서 오신 송선생, 어디 있습네까?” 소리난 방향으로 두리번 거리며 찾아가보니 그 사람은 처음 방문했을 때의 그 안내인이 아니다.

처음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내 여권과 비행기표를 받아, 가지고 있는 가방에 넣더니 나에게 하는 말이 “송선의 동생은 소련에서 못나왔시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맥이 탁 풀리며 일이 잘못되어가는 느낌이 확 든다. 이제 어떻하나? 잘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번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최고급 호텔인 고려호텔로 숙소를 정해주는 것이다.

지난 번에 만나 부탁드렸던 그분들을 고려호텔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을 하며 다른 부탁을 해보기로했다. 처음 왔을 때에 여동생들을 만날 수있도록 힘써 준 은혜에 감사함의 표시로 가지고 간 푸짐한 선물들을 전해주면서 그 여동생들을 이곳 평양으로 불러줄 수있겠느냐고 간청했다.

동생들과 조카들은 첫방문 때 우리가 가져다준 옷들을 입고있어 형색이 조금 좋아진 것을 느낄 수있었다. 그래서 며칠동안 평양에 서 함께 지낼 수있도록 편리를 봐준 뒤 후에 평양공항까지 나와 나를 배웅하게 하였으며 동생들과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 만나기위해 세번째 북한방문

나는 그 동생의 생사를 확인 하기 위해서라도 꼭 찾아 만나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약속을 믿고 5개월 만 다시 9월에 세번째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평양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나를 감시할 안내인이 또 바뀌었다. 김일성 뺏지를 가슴에 단 여성이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어과를 전공했다는 아주 세련된 여성이었다.

“Canada 에서 오신 송영석 선생 맞습네까?” “네 그렇습다.” 1,2 차 입국때와 마찬가지로 여권과 비행기표를 내게서 받아 쥔 다음에야 하는 말이, “소련에서 동생이 얼마 전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 왔습네다.” 그 말을 들으니 “아! 살아있었구나!” 하며 갑자기 안도감이 느껴진다.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며 안내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대동강변에 있는 보통강 려관 앞에 도착한 다음 방까지 안내해 준다. “선생님 내일 아침 식사 후에는 방에서 기다려 주시라여 다시 연락 드리갔습네다”하고는 가버린다. 다음날 아침에는 미니 버스에서, 가족 방문 온 재미교포들과 함께 만나, 평양에 도착하면 반드시 먼저 참관 해야 한다는 “고향의 집”을 오늘은 세번째의 의무적인 방문을 또다시 하게 되었다.

평양역에 나가 기차를 타고, 묘향산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이라는 곳에 1박2일 코스로 다녀 오기도도 했. 또 다음 날은 일본 관광객들과 함께 평양공항에서 프로펠라 달린 항공편으로 백두산관광 을 1박 2일 코스로 다녀 왔다.

“오늘은 소련에서 조국에 돌아온 동생을 찾아 가는 날입네다!” 감시원이 다시 남자로 바뀌었다. 평양역으로 나가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으니 만감이 교차된다. 어렸을 때 함께 지냈던 동생 생각이 많이 난다.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동생의 별명은 장군이었다. 어릴 때 내가 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형제들도 모두 이남에 피난가고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시어 여동생들을 돌보며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계속 눈물이 난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가 불구가 된 남동생

어떻게 얼마나 많이 변해 있을까? 참 궁금하다. 기차가 하도 느리게 가니 지루하다. 하루 종일 가는 것같다. “이제 다음역에 가서 내리면 됩네다.” 감시원이 말해 준다. 평양을 떠나 몇시간을 달려가니 동생이 살고있다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다보니 먼거리에서 부터 다리를심하게 절뚝 거리며ㅜ부지런히 걸어오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 온다.

동행한 감시원과 함께 동생집에 도착해 보니, 내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군당으로 부터 전해 듣고 동생가족들이 다들 모여있었다.이제 야 전쟁 중에도 죽지않고 북한 땅에 살아 있는 세 동생들을 다 찾아 다시 만나게 되니 내가 스스로 가지고 있던 큰 부담이 조금은 줄어 든 것 같아, 마음은 조금 가볍다.

저 사람은 뭘 하다가 저렇게 됐을까?” 참 안됐다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 오는 것을 보니 너무나 놀랬다. 바로 내 동생이었다. 그 자리서 동생과 부둥켜 않았다. 너무나 불쌍하게 변한 동생의 모습에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네가 왜 이렇게 불편한 몸이 됐냐고 물으니 동생 대답에 기가 막힌다. “작업 중에 영양실조로 인해 관절염을 앓았으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병신이 됐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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