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묘소 앞에서 울고 또 울고- 송영석의 천로역정 (4)

반동가족 누명 쓴 어머니 인민재판에 끌려가 고문 뒤 처형

평안북도 동림읍(邑)에서 한참 떨어진 산 기슭에 단 두채의 엉성한 집이 있었는데 좌측에 있는 집이 7살때 헤어졌던 여동생의 집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동생이 하는 말이 옆집 가족이 어제 밤에 어디론가 다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 말을 듣고나니 어제 기차역에서 부터 동생집까지 오는 길에 주위를 계속 살펴보니 40년전 전쟁시에 내가 살던 곳의 분위기와 지금의 이곳 분위기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생집에는 먼 나라 캐나다에서 오라버니가 방문한다고 하여 군당(군청,郡廳)에서 특별히 전기를 공급해 주었고 화장실도 수세식은 아니지만 약간 손을 본 것같다. 그리고 밤에는 화장실(변소) 에 갈수있도록 외등(外燈)도 켜 주었다.

아침부터 어머니 산소에 간다고 나름대로 제(祭)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동생이 뒷 마당으로 나를 안내 하더니 뒷 산을 가리키며 저쪽에 엄마 산소가 있다고 말해 준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 지며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 벌목공으로 가 있는 동생의 가족과, 평안북도 대관군(郡)에 산다는 막내 동생 가족들, 그리고 생각지 도 못했던 함경북도 회령에 사는 외사촌 동생도 나를 만나기 위해 어제 여동생집에 모두 와 있었다.

평양에서부터 나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안내인의 말이 송선생 부부와 두 여동생은 한방을 쓰고 다른 동무들은 다 다른 방에서 자라우… 지시한다. 방은 하나였는데 어떻게 자나 했더니 방 가운데에 카텐을 치니 결국 두 방으로 나눠 졌다.

 어머니 산소에 도착했다. 비석(碑石)도 새로 세워져 있었고 비석 옆쪽으로는 이런글이 쓰여져 있었다. “1958년 5월 18일 사망.” 5월18일은 또 어머니 생일이라고 여동생은 말한다.

묘비엔 묘주로 송종석 송영석 송유석, 우리 형제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평생 보고 싶고 그리웠던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산소에 온 것이 꿈만 같다. 산소에 엎드려 가슴이 복받혀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동생들에게 “너희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순간 막내 여동생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있시여? 우리 수령님이 다 잘 해 주시는데…”

세뇌(洗腦)받고 자란 동생들에게 내가 말조심을 해야겠구나 하고 더이상 신(神)에 대하여는 언급을 자제했다. 사실 나 자신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형제끼리도 마음놓고 대화 할수 없는 지독한 정부의 행태도 경험하게 되었으며 나에게 왜 이러한 고생과 고난이 있었는지는 그후 7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분은 곧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어머님의 죽으심은 나를 포함한 10명의 가족들 중에 막내가 병으로 전쟁 중에 죽었고 나머지는 한명씩 각각 이남(以南)으로 피난갔으나 소식이 완전히 끊긴 상황에서 11살 짜리 아이의 행방불명이 더 큰 문제가 되어 어머님이 보안서(경찰서)로 끌려가 인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반동 가족의 누명을 씌우고 본보기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13년만에 알게된 어머니 산소의 비밀

서울에 살고 있는 형님이 중국 여행 중에 알게된 이야기라고 하면서 나에게 2004년에 국제 전화 로 알려줘 그때서야 내가 두번에 걸쳐 찾아 갔던 어머니의 산소는 가짜였으며 결국은 동생 가족들의 속임수 였으나 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한편 이해가 된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동생들을 더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내 동생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또 눈물이 난다. 어찌 세상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 났을까? 어린 동생들에게 시신을 돌려 주지 않고 그들의 방법대로 또다른 시체들과 함께 어디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일은 동생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 군당(군청)의 지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오빠가 너희들을 만나러 먼 나라 캐나다에서 조국에 온다고 하니 분명 군당(군청) 의 지시로 가짜 묘를 만들어 나를 속인 것이 틀림 없는 것 같다.

산소 앞에 엎드려 한참을 복받혀 울다가 일어나 돌아서니 방문시에 역에서 처음 만났던 여동생만 유독 뒤를 돌아서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표정이 없는 무덤덤한 모습들이다. 이제 헤어지면 이 동생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나는 아주 먼곳에 산과 맞 닿은 하늘을 쳐다보며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며 울부 짖으며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나만 아는 비밀이었는데 이 시간 하나님앞에 다털어 놓으며 회개하며 용서를 빌었다.

“피난 중에 배 고팟던 어린 시절 몰래 형제들의 깡보리밥까지 훔쳐먹은 적도 있었으며 많은 나쁜 짓을 하며 잘못 살아온 이 나쁜놈을 하나님아버지 저를 용서해주십시요/ 저는 이 시간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하나님, 못되고 참으로 나쁜놈인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도 남들 처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는 더 큰 소리로 하나님께 더 크게 울부 짖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 저는 앞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 할 때에 돌연 내 양쪽 눈으로부터 저 멀리 보이던 그곳 까지 길게 타는 불같이 벌건 불길이 뻗쳐 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 그리고는 그후 내머리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1997년에 경험한 성령체험과 혹 무슨 연관이 있었던 불이었나? 하고는 까맣게 잊어 버렸었다.

산 오리 들고 사흘 기차타고 찾아온 외사촌 동생

외사촌 동생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리 두마리를 산채로 각각 주둥이(괚괙소리를 지르면 몰수 당 할걸 알고)와 두 다리를 하나로 묶은채로 푸대 속에 함께 넣고 3일에 걸쳐 찿아왔다.

동생들이 가져온 오리를 탕(湯)을 만들어 주었는데 나는 입이 짧아 먹지를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와 내 아내에게만 통닭을 삶아 주었는데 나는 먹을 마음이 없어 ”나는 아버지를 닮아 육식(肉食)을 좋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다음날 아침에는 생선 사시미를 접시에 담아 상(床)위에 올려 놓고 하는 말이 “아버지께서는 생전(生前)에 생선(生鮮)은 드셨디요?” 하면서 나더러 하는 말이 오라버님이 동생들을 만나러 40년만에 멀리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꼭 한번 드셔 보시라요? 한다.

(☞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너무 난다 동생들이 다시 생각나 큰 소리로 통곡을 하고…자리에 잠시 누었다가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정심(貞心)아 이 생선은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잉어라고 한다. 이건 얼마나 주고 샀느냐고 물어 보니 70원 줬시요 라고 한다. 그럼 닭은 얼마에 샀느냐고 물으니 100원 줬시요 한다. 본래 나는 잉어 사시미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동생의 성의(誠意)를 봐서 한점을 집어 먹었다.

너는 직장이 어디고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고 물으니 직장은 남새(채소)공장이고 월급은 한달에 70원을 받는다고 한다. 외사촌 동생의 직업은 목수 6급이고 지금 이 집에 있는 여동생의 이불장도 자신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회령에서 산삼이나 귀한 버섯들을 수령님께 올려드리는 상자는 반드시 자기가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목수의 최고는 6급이라고). 그리고 나에게 하는 말이 어렸을 때 코 질질 흘리며 따라 다닌다고 형님한테 알밤을 맞은 적이 있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런걸 보면 나는 어렸을 때 사랑이 없는 이기주의자였던 같다.

평양 봉수교회 방문, 밴쿠버 헌금 5백달러 전달

아침 식사후에 강당에 모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10시에 출발한다고 알려준다. 성당에 갈 사람, 불교(절)에 갈 사람, 봉수교회에 갈 사람들의 인원을 파악하고 승차시킨다. 나는 봉수교회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도착한 다음 안내를 받고 교회에 들어갔다.

내가 이민 와서 50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전 가족과 함께 밴쿠버에 있는 교회에 출석할 때였다. 밴쿠버 버나비에 있는 BC순복음 교회에서 평양을 다녀온다고 하니 교회에서 US $500불을 봉수교회에 헌금하라고 준다.

나는 함에 넣어 헌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안내인에게 여기에서 제일 높은 관계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니 한분을 소개시켜 준다 명함을 받아보니 거창하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기독교 연맹 서기장 고기준 목사(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북한 기독교 최고책임자라고 한다. 나는 그분에게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BC순복음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교회에서 특별히 봉수교회에 전할 헌금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왔는데 예배 끝난 다음에 단(壇)위에 올라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제가 직접 목사님에 게 전달하고 싶다고 하니 동의를 해줘서 내 계획대로 전할 수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목사님! 봉투열어 보시고 영수증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종이를 찾는 것같았다. 다시 목사님 명함 뒷면에 적어 주셔도 됩니다 하니 자신의 명함 뒷면에 영수증을 적어주는 것이다. 나는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그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곳 평양에 살고있는 교인들 약 200여명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송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는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에는 깊은 동포애를 느끼면서 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또 이산의 아픔을 더욱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밴쿠버로 돌아온 다음 교회에 출석하여 귀국 인사를 드리는 과정에 주머니에서 봉수교회에서 받아온 영수증을 교인들에게 보여주니 모두가 즐겁게 웃는 것을 보고 이제야 하나님의 돈을 올바로 전달했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다.

북한의 무역회사와 합영계약(合營契約)을 맺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동생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로 고민 중에 첫번 방문때에 전충림사장으로부터 소개 받았던 세 사람의 북한 간부들을 다시 만나 직접 물어 보기로 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US $ 100만불 이상을 북한에 투자하면 온 가족들을 평양에 들어와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토론토에서 신문사를 경영하고 있는 전충림사장은 나의 여동생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1991.4.15 김일성 생일 축하 공연 참관단으로 그 장소에서 내가 목격한 바로는 내부는 1층과 2층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중간 문이 열리며 김일성 일행이 들어 올 때 바로 뒤에는 캄보디아 국왕이었던 시아누크공이었

고 입구 왼쪽에 늘어선 사람들 중에 세번째에 전충림사장이 서서 김일성과 악수하는 것을 직접 볼 수있었다.

결국 나는 그분이 보증이 되어 북한 간부의 소개로 북한 무역회사 사장을 소개받았다. 그는 북한의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로 국가에 공을 세우고 외화벌이 회사의 사장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합의서를 가지고 왔으며 내가 제시하는 금액은 US 1백25만달러였고 서로 사인하고 나면 그 즉시 발효(發效)되어 협의에 들어가기로 한 합영계약서(合營契約書)인 것이다.

1백25만불 계약한뒤 북한투자부장 면담

그날 계약식이 끝나니 상대방 사장이 오늘 점심은 자기가 옥류관 냉면으로 대접을 하겠다고 한다. 또 저녁에는 나의 평양 체재시에 따라다니던 안내인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는 저녁에 투자 담당 부장(長官)이 저녁 시간에 잠간 내가 투숙하고 있는 보통강 려관을 직접 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나는 안내인에게 부장님께서는 공무에 바쁘실 터인데 나같은 사람까지 만나 실 수 있겠냐고 하면서 사실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니 가지고온 선물도 없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안내인의 이야기가 “거져 매점에서 양담배 몇보루 사가지고 계시라여” 하고는 이따가 모시고 오겠다는 것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안내인이 왔다. 지금 위 층으로 올라갈 엘리베이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준비해 둔 양담배를 갖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장에 들어서니 굉장히 큰 회의장이 있었고 부장은 벽쪽으로 걸어가 중간쯤에 있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는 아래 의자에 앉고 나는 그 회의 탁자 앞쪽에 마주 앉게 되었다. 안내인은 들어온 끝 줄에 앉아서 대담 내용을 적는 것같았다.

약 한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나한테 질문은 몇마디 물어보고는 주로 북한이 군사적으로도 엄청 강한 나라라는 것을 강조했다. 1968년에 있었던 미국의 푸에불로 정보함과 해군 전체를 포로로 잡았던 당시 세상이 떠들썩 했던 역사를 알고 있느냐고 묻길래 TV와 신문지상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아새끼들을 혼내 줄려고 그랬디!… 그리고 하는 말은 주로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해서… 시간을 보낸것 같다… 북한에서 군함과 미군을 납치한 것을 자랑스럽게 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다음날엔 합영회사 사장으로부터 1m가량되는 큰 도자기 선물을 주길래 감사히 받고 이 도자기를 일주일전 북한에 오기 전 한국의 투자자 부부와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저녁을 함께한 사모님에게 선물 할 마음으로 가지고 왔다.

투자자 사장님과 만났는데 깜짝놀랄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불과 일주일전 그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사장이 한 이야기는 집사람이 몸안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담당의사로부터 나이가 한참 더 들어서 수술을 받아도 되고 지금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후 부인의 의견대로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었으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결국 사망했고 어제야 비로서 장례도 다 마쳤다고 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불과 일주일 사이에 기막힌 일이 있어났던 것이다.

지난 주에 만났던 부인의 모습이 생생하고 “잘 다녀오셔요”라는 인사말까지 들었었는데-.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모를 일이구나 … (야고보서4:14)

북한에서 생산되고 있는 샘물(生水)공장 방문은 강원도 원산을 조금 지나 위치한 금강샘물 공장을 안내 받았는데 일본의 조총련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곳으로 이미 시설이 많이 낡은 것을 볼 수있었다.

그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금강샘물과 다른 공장의 제품인 백두샘물 그리고 신덕샘물도 함께 가지고 와 캐나다에서 실험을 해보니 모두가 기준 미달로 밝여졌다. 그들에게 다시 지하100-150m 암반에서 나오는 물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후에 캐나다로 연락 온 내용은 새로운 장소를 발견했으니 평양에 와 달라는 탤렉스였다. 다시 방북하여 관계자들과 차를 타고 금강산 가까이에 있는 목적지 까지 갔었으나 그들은 내가 요구했던 대로가 아니였다,

결국은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함께 투자하기로 약속했던 분과 협의하에 그 사업을 일단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들을 평양에 불러들일 투자사업이 안타갑게 결실을 맺지못하고 북한 동생들과의 연락도 끊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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