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 외국 나가서 살겠어
1965년 말 군 제대 후 집에 오니 집안 형편은 별로 나아진게 없었다. 나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당시 대구 대명동 전체를 PVC 수도관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일용직으로 들어갔다. 매일 직경 4cm (일본 말로 인치항} 수도관을 묻을 땅을 곡괭이로 파는 일이었다 그것도 얼어붙은 땅을 1m 깊이까지 파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도 몇 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다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것저것 알아 보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따스한 봄볕이 내려 쪼이는 어느 날 정오였다. 마루에 걸터앉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하고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빗장이 풀려있는 대문을 살짝 밀리더니 얼굴을 내밀었다. 한 5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빛바랜 누른 가족 가방을 들고 느닷없이 안으로 들어와 채권이나 고서 고물를 팔라고 했다.
그는 대뜸 왜 남의 집에 불쑥 들어오냐고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이만 나가라고 했다. 남자는 넉살좋게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했다. 아무 말 않고 물 한 사발을내어 주었다. 남자는 목이 말랐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신뒤 슬그머니 내 옆에 않더니만 나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고는 느닷없이 “총각, 보아하니 외국 나가서 살겠어” 하고 이야기했다. 내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쓸데없는 말씀하시고 이마나가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내가 투박스럽게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을 일으킬 사람이로세, 늙으면 호의호식 하겠어, 당신 외국에서 살 팔자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귀에 닿지도 않는 말을 자꾸 지껄이는 그 사내를 밀어서 내보내려 했다. 그런데도 또 느닷없이 말을 보태는 것이었다.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하면 틀림없이 내 말대로 될 거야. 외국 나가서 살 팔자거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일 없다는 뜻 대문을 나섰다. 잠시 뒷골목에 길을 돌아다니며 “채권이나 고물 삽니다” 하는 중저음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다.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내가 흘리듯이 툭 던지고 간 말해서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영어 회화 공부가 뇌리를 스쳤다 .
내가 캐나다로 이민 와서 가정 고생 끝에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졌을때 문득 그 고물수집 상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워낙 먹고 살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바로 그 사내가 동기부여를 준 은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만약 그런 동기부여가 없었다면 평생 막 노동이나 해 먹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당장 영어회화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새벽과 정오에는 옛날에 몸담았던 파인트리클럽을 찾았다. 군대동안 잠시 손 놓고 있었던 영문타자도 더 열심히 연습했다. 그 당시 파인트리클럽 미팅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미국 공무원에서 매주 있었다. 정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매진했다. 내 일생에 그때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5급 말단 공무원에서 USOM으로
1968년 경북도청 건설국에서 경상북도 전체 논밭의 용수로와 배수로 작업을 위한 5급 말단 직원 뽑았다 당시의 공무원 보수가 지금보다 열악했지만 당시만해도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기 힘든 때라 입사경쟁도 무척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았던지 면접을 보고 곧 채용이 되었다 .
근무 부서는 토목과였다. 첫 봉급으로는 어머니 내의를 사드렸다. 그 당시 말단 공무원의 봉급은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해서 혼자서 귀에도 빠듯했다’ 또 하나 힘든 점은 출퇴근이였다 집에서 도청까지 먼 거리를 천장이 낮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건설국 직원들의 거친 욕설도 나를 힘들게 했지만 한쪽 귀로 흘리면서 앞만 보고 나름대로 충실히 일했다,
어느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키가 크고 점잖게 생긴 흑인 신사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짐작에는 이 흑인신사도 화장실 가나 보다 싶어 “ Good Morning. How are You?”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흑인 심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헤어졌다.
그 이후에 그 일은 까맣게 잊어 버렸는데 어느날 정우 무렵이었다 그 흑인 심사와 화장실에서 또 한번 마주쳤다. 소변기 앞에서 흑인 신사가 먼저 나에게 “ How are you? What is your name?”이라고 물었다. 나는 미국공보원에서 미국 직원들에게 하던대로 몇 마디 섞어서 내 소개를 좀 상세히 그리고 길게 한 뒤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 흑인 신차도 손을 씻고 나라 따라오며 영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마침 정오가 되어 점심식사 점심시간이 된 터라 복도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흑인 신사가 나에게 명함을 건네며 이야기하자 도청 직원들이 “저 친구가 영어를 하는 줄 몰랐네”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나와 흑인 신사를 힐것힐것 쳐다보는 것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본듯됐다.
흑인 신사가 건넨 명함을 보니 청사 2층에 위치한 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iion : 미국원조 및 정보기구} 사무처장으로 되어 있었다. 워낙 오래 전이라 그 흑인 시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는 그 이름을 부르기도 했는데 흑인 신사가 자기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 유솜 사무처에 들어가니 백인 남녀 직원과 한국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영문 타자를 칠 줄 아냐고 물었다. 오케이라고 했더니 흑인 신사는 타자기가 얹힌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놓고는 타이핑을 해 보라고 했다. 막상 타이핑을 하려고 하니 책상 위에 놓인 타자기가 IBM 전동타자였다. 그때까지 연습해온 타자기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타이핑하는 수동식 UNderwood 타자기이었다다. 그래서 흑인 신사에게 전동타자기는 손에 익지않아 곤란하다고 했더니 수동식 Smith Corona 타자기가 있는 다른 책상으로 데려가서 타이핑을 해 보라고 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자 말자 물만난 고기처럼 빠른 속도로 타이핑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흑인 심사가 빙그레 웃으며 여기 USOM에서 일할 시간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급여까지 말했다.
USPM에서 제시한 봉급은 도청 건설국 말단 공무원 봉급 보다 월등히 많았다.
며칠뒤 몇 가지 보안절차를 걸쳐 유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가 바뀐 믿음의 대구에 소재한 중견 무역회사 수출입이 직원으로 채용되어 수출 전선에서 열심히 근무했다. 복학은 했지만 낮에는 돈벌이에 했기 때문에 영남대학교 야간 대학으로 옮겼다 무역회사에 다닌지 3년 되었을 무렵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