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11 월2일은 36년간 강화도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하여 이민 생활을 시작한 날이다. 그동안 나 자신과 나의 가족을 위해서 내 가 낳은 자식들은 나처럼 이산의 아픔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고 다음으로 북한에 살고 있는 어머니 와 세명의 동생들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
KBS방송국에서 주관하는 이산가족 찾기에도 적극 참여 했었으나 그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KBS본관 건물주변에는 종이를 붙일 공간이 전혀 없어 앞마당에 종이를 붙이고 서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내가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찾아보기 위해서는 나는 그 일이 가능한 나라 캐나다에 이민을 결심을 하게된 것이다.
지난 1982.3.1 동양화재 임원으로 첫 회의를 마치고 나와 내가 처음 한 일은 내 사직서를 작성하여 책상 설합 깊이 보관해 두었던 일이었다. 이제 그 사직서 를 87년 8월, 5년여 만에 꺼내어 날짜와 이미 써 놓았던 이름 밑에 나의 도장을 찍고 한진그룹 25년의 근무를 마감했다.
밴쿠버엔 네 딸 모두 함께 왔다. 큰딸이 이화여대 영문과 3학년이었는데 UBC로 편입하려 했으나 영어기초코스인 ESL에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밴쿠버로 왔다.
조건부 투자 이민자격으로는 US $300,000 의 재산을 보유한 증명이 인정되고 한국 주재 캐나다 대사관에서 인터뷰에 통과되면 신체 검사를 받고 이상이없는 사람이면 이민이 된다. 그리고 도착 1년 안에 1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고 그에게 1년 동안 Pay한 서류를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해서 승인을 받으면 조건이 해제되는 제도이다.
이민 브로커를 통하여 투자처를 찾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Vancouver Delta지역에 위치한 백인이 운영하는 filtration 생산하는 회사를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고 자료를 받고 검토해
보았으나 문제는 생산되는 제품에 대하여 내가 너무 무지하고 또 한가지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이 내게는 투자 결심이 쉽지 않았다. 이민자에게 영어 교육system이 있어 열심히 참석해 보았지만 가장으로써 정착하는 준비가 부담도 되고 공부도 안되고 해서 그대로 자퇴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사람들 사귀며 지내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나는 자동으로 대답이 나왔다. “내 나이가 내일 모레면 50인데 지금 누굴 믿고 살겠냐”고 하며 “지금까지 살던대로 그냥 그대로 살려고 한다”며 거절했다.
풍림산업 휘슬러 콘도 사업 현지대표가 되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풍림산업주식회사 사장의 전화다. 1988년8월의 날씨는 밴쿠버 최고의 계절이다. 미국은 자주 다녀 봤지만 옆 나라 캐나다는 가본적이 없는데 송간사( 幹事)(연세대학교 최고 경영자과정 동창회 회장단 부회장인 이필웅사장)가 캐나다에 이민을 갔으니 이번에 밴쿠버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사장 일행은 해외담당 부사장과 그리고 해외담당 김중식과장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하는 이야기는 회사에서 계획한 사업이 콘도 사업인데 주한 캐나다 대사관의 상무관을 만난 바로는 위슬러에 세계적인 스키장이 있으니 그 곳을 첫번 후보지로 정하고 두번째는 나나이모섬에 콘도를 지을 만한 땅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며 내게 부탁하는 것은 믿을 만한 realtor 와 함께 다녀 보자는 것이다.
나는 동문 모임에서 처음 알게된 후배를 마음에 두고 그 후배에게 전화로 이번에 들은 사업이야기를 하니 “선배님 제가 바로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하며 찾아왔다. 사업계획에 대해 설명을 다 듣고는 그럼 위슬로와 나나이모쪽에 시장에 나와 있는 정보를 가지고 함께 제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한국기업이 부동산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캐나다에 주소가 있어야 하고 그 회사에 캐나다 시미권자나 영주권자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여 Pooglim Development Canada Ltd/ Director youngseok.song으로 발령을 받고 캐나다에서 회사 대표 역활을 하게됐다.
Owner 사장이니 만큼 즉석에서 결정이 되니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이 될 수 있었다. 위슬러호텔에서 하루 밤을 지내며 그곳에 땅을 매입하고 그 자리 에 12개의 unit으로 멋있는 condo-minium을 짓기로 결정했다. 첫째 project 에 들어가는 공사 금액의 일부는 한일은행 밴쿠버지점에서 Loan을 빌리는 것으로 하고 그 일은 내가 계속 추진하였고 Director의 자격으로 Sign 을 했다.
그리고 나나이모 계획은 이번에는 땅만 매입하는 것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후배 realtor의 정보 능력으로 Canada Royal bank 회장이 가지고 있던 좋은 위치에 있는 땅이 공개입찰(公開入札)로 나온 것을 Canadian $3,000,000로 낙찰 받아 그 금액은 한국에서 직접 송금함으로 그 일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위슬러에 condo는 완성되어 콘도 관리 전문회사에 위탁관리를 시켰었다. 그후 한국에 외환관리 규정이 개정되어 어쩔수 없이 해외 자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Canada사업을 접게 되었으나 그동안 Canada는 부동산 경기가 좋아 두 군데 모두 아주 좋은 가격을 받음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투자이민 조건 해제 위해 코인론드리 인수
집을 소개 했던 realtor에게 이민 조건을 해제 할 만한 Business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약속이 되었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장소는 Coquitlam에 있는 깨끗한 상가 건물내에 있는 coin-laundry 였다. 혼자 생각에 월급쟁이로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모험을 하지말고 계약을 하자. 망해도 세탁기는 남겠구나 하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코퀴틀람 코인론드리를 인수해서 그런데로 잘 운영했다. 아내는 간단한 수선같은 것을 서비스로 해주어 손님을 끌었다. 그러나 딸이 4명인데 코인론드리 집 딸 타이틀이 좋지않게 보인다며 팔자고 아내가 제의했고 딱 1년이 지나고 바로팔 았다. 그 때는 인수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다.
롯데관광 동화면세점 중국사업본부장으로
이후 내 친한 친구가 롯데관광의 전무를 소개했고 그 롯데전무가 자기 회장에게 나를 소개 했다. 그 회장도 북한사업에 흥미가 있다고 해서 만나게 되었으나 서로 대화를 깊이 나누다 보니 중국 사업 문제도 함께 의논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유영무역주식회사와 북한의 외화벌이 무역회사와 합영계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관광사업계획서도 북한 관계기관에 계획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그래서 단독으로 진행할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었기에 회장이 만나자고 했을 때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그후 캐나다 집으로 다시 연락이 왔다 회장이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니 서울에 나와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일단 만나 보기로 하고 서울로 날아갔다. 광화문 사거리 파출소 뒤쪽에 있는 건물이다. 12층 회장실에서 단독으로 만났을 때 나에게 제안 한 것은 한진에서 상무로 있었다니 전무이사로 롯데관광과, 동화면세점, 그리고 동화종합상사 주식회사 3개 회사의 중국사업 본부장을 맡아서 일해 달라는 것이다.
회장은 사업 구상을 나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우선 먼저 북경공항에 면세점을 내게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재고품을 그 면세점을 통해 판매를 하겠다는 것이다. 지하에 함께 내려가 쌓여있는 재고품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사실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일상용어 정도였으며 한자(漢字)에 대하여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북경호텔 과 같은 라인에 있는 경륜호텔(京倫飯店) 3053호실을 숙소 겸 사무실로 약 9개월간을 사용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북경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선족 사장(方人國)을 알게되어 북경에 체재하는 동안 매일 그와 만나면서 나의 통역도 해주며 북경 생활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분이 한족(漢族)과도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있었다. 롯데에서 받은 사업계획서(事業計劃書)를 방사장을 통하여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일요일엔 북경한인기독인 모임에 출석
승용차도 가지고 있었고 일요일이 되면 북경시내에 있는 조선족이 모이는 교회도 함께 다녔었다. 또 북경에는 LG, 선경등 한국기업의 주재원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도 알게 되어 그후에는 재북경한인기독인(在北京韓人基督人)모임에도 함께 출석하였다. 그때도 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소원(所願)하며 일요일 되면 교회를 다녔다. 현재 그 모임에 담임 목사라는 분을 2018년도에 캐나다 캘거리 한우리교회에서 초청받고 오셨을 때 우연히 만나본 적이 있다.
북경에는 천안문(天安 門)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며 또 현 정부실세들과도 관계가 좋아야 그곳에서 계속 살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외곽으로 쫓겨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 중에 왕사장이란 분인 한족을 방사장이 나에게 소개해 알게 되었다. 현재 면세점을 총괄하는 실세가 왕사장의 선친이 키운 사람이라고 한다. 중국사람들은 이러한 인맥을 중시하는 풍습(꽌시)이 있다고 한다. 왕사장의 중간 역활이 있었기에 진행이 순조로왔다.
3개월 쯤 되었을때 계약 이야기가 나왔다. 회장에게 보고 하니 (그때는 서울 북경 직항로가 없을 때였다) 천진(天津) 공항으로 부인과 함께 도착시간을 알려준다. 북경공항에 면세점을 승인해 줄 수있는 최고 책임자와 도착하는 날 저녁을 함께 할 한국식당 VIP룸과 투숙할 호텔도 예약을 마쳤다.
회장 내외분이 천진공항에 도착하는 날 관계기관에서 내외분이 탈 벤스 승용차와 면세점 실무 책임자의 차와 경호차, 나와 통역의 차까지 4대가 천진까지 가서 두분을 환영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호텔에서 잠시 쉬고…한국 식당 VIP룸에서 회장내외분과 면세점 계약서에 싸인할 분 내외와 나와 통역이 함께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선물 교환하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 만나는 회장이 상대방 부부 앞에서 자기 자랑이 심했다. 친형이 대한민국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였다는 것이 추진하는 이번 사업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또 회사 자랑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국 온 본사회장 자기자랑 너무 심해 당혹감
회사 자랑이 왜 그렇게 필요한지 그동안 회사선전 책자들을 나름대로 갔다주어 그분들도 이미 다 보았을텐
데 그룹 회장이 와서 또 회사 소개를 또 할 필요가 있는건지…내가 아는 중국 사람들은 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검소하고 머리가 꽉 찬 사람들이 그래도 많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사람을 너무 얕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못준 것같다는 인상을 끝날 때까지 지울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좀 더 겸손함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만남이 된 것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너무 상하게한 것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나에게 나쁜 소식이 들어 왔다. 그동안 중간에서 열심히 도와준 왕사장이 그런다면서 오늘 계약서 사인하기 전까지 US 오십만불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 돈은 적은 돈이 아니다. 나름대로 내가 역제안을 해봤다.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먼저 계약을 체결하자 그리고 면세점을 open하고 수입금에서 일반 경비 제하고 남는 금액을 지급해 주겠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계약은 성사되지 못하고 중국사업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정부 외환규정이 까다로와 현금 5천불 이상을 소지하고 나올 수도 없었기에 합리적인 방법은 이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끝내 받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성균관대 동문회 가서 북한방문 가능성 얻다
밴쿠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에 성균관대학교 동문회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게 되었다. 아는 얼굴은 한명도 없고 54학번이라는 최고 선배분이 인사를 하는 중에 금년 (1990) 4월에 가족을 찾아 북한을 다녀올 계획을 말씀하신다.
나는 모임이 끝난 후에 그 김재상 선배님에게 조용히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제가 이민 오게된 동기가 전쟁때 헤어진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니 집주소하고 전화번호를 주신다. 언제든지 전화하고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다음날 고급포도주 한병을 사들고 찾아가 만났다. 방에서 종이들을 들고 인나오신다. 그 종이 는 북한에서 보내온 것이다.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데 우선 종이 상면에는 북한 국가 심벌인 큰 별이 그려져 있었다.
“김재상 선생의 조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외동포위원장”으로 기억이 되고 나머지 3장 정도가 더 있었던 것같다.
이야기인즉 본인은 캐나다 공무원 신분으로 북한에서 우편으로 온 서류들을 보니 무섭기도 하고 평양에 들어 갈 생각을 하니 겁이 난다는 것이다.일 단 직장에는 출발 날짜와 다시 돌아오는 날을 알려주었고 만약 제 날자에 돌아오지 않으면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알고 정부 차원에서 나를 구해달라는 글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집 책상 설합에는 아무도 모르게 유언을 적어 놓고 다녀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신다.
나는 준비 해 가지고 간 북한 황해도 집주소와 어머니와 동생들의 이름과 나이를적은 내용을 전해 드렸다. 북한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에게 이 가족의 생사를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해 보겠다는 것이다. 한달 후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결과를 알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 왔다.
꼭 한달 만에 북한에 다녀온 선배로 부터 세 동생들의 주소를 전해 받았다. 38이남황해도 연백군에 살 때 나와 헤어졌었는데 동생들의 주소를 보니 모두 평안북도 였다. 는 그동안 성분이 나쁜 이산 가족들을 함 경도나 평안도 북쪽으로 이주시켰다는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김재상 선배 도움으로 북한동생들 사진 받다
나는 우선 세명의 동생들 집으로 각각 보내는 편지에 동생들이 영어를 모를것을 알고 동생들이 그곳에서 나에게 보낼 편지 봉투를 영어로 써서 함께 넣어 나와 내 가족 사진을 동봉해서 5월에 우편으로 보냈다. 그런 일은 캐나다에서는 가능했다. 그후 5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mail box 를 열어보고 깝짝놀랬다. 항공 봉투에 내가 동생들에게 써서 보냈던 봉투가 온 것이다. 북한 우표가 여러개 붙어있었다. 4살 7살 9살때 헤어진 동생들 중에 7살때 헤어진 여 동생 한테서 온 편지였다.
그 편지를 근거로 선배님이 적어준 주소로 토론토 전충림 사장에게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드려 인사를 하고 잘 도와 달라고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전충림씨는 이산가족의 대부라 할만큼 북한 내외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10여일이 지난 다음 전충림 사장으로 부터 나에게 대봉투가 왔다. 내용을 보니 북한 정부에서 온 내 신상에 대해서 적어 보내야 할 서류 양식이었다. 거기에는 주소와 학력과 경력란이 있었고 1991년 김일성생일 축하 공연 참관단으로 초청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작성하고 아내와 함께 갔으면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전충림 사장에게 보냈다.
전충림씨 통해 김일성생일축하 참관단으로 초청장
나는 사실 동생들의 모 습이 많이ㅜ흐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보내준 동생들의 흑백사진의 모습을 보고 틀림는 내동생들임을 확신 할 수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난다. 그후1991년 3월말에 북경공항 가까이 있는 호텔에 모여 함께 북한에 들어 갈 인원이 100명이 넘었다. 대부분이 미국에서 왔고 캐나다, 브라질, 알젠티이나, 호주 등에서 온 사람들였다. 대부분이 70대 80대 였으며 그때 내 나이는 51세 였다. 나보다 더젊은 부부는 아버지대신 참가한 케이스였다.
모두 비자를 받고 북한으로 떠나기 위해 북경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북한으로 가는 여객기는 공항 대합실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는 게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활주로 끝에 출발지역에 대기중인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청사에서 걸어 나와 Bus를타고 북한 비행기까지 가야 하는 과정이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