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변수(邉燧, 1861년 ~ 1891년)로 위키백과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말기인 1882년 그는 일본에 유학 갔다 임오군란으로 귀국한 뒤 이듬해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이 미국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한다. 1890년부터는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나 1891년 모교 입구 정거장에서 열차 사고로 요절했다.
그러면 한인 최초의 캐나다 유학생은 누구일까? 그 주인공은 북간도 용정 출신으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28년 토론토대 이매뉴얼 신학대로 건너온 문재린이다. 문익환목사의 부친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노래에서 표현되어 있듯 근대 한국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 본거지 출신 선구자의 한 명이라 할 수있다.
조선말기 만주로 집단이주한 함북 유학자의 후손
문재린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군 화산면 녹야리에서 문치정과 박정애 부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문익점의 25대손인 그는 온순한 성격으로 어린시절 ‘기린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9년 2월, 문재린의 가족은 뜻을 같이한 함북 지역 주민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불리던 만주 화룡현 명동촌으로 집단 이주하게된다. 유학자 문병규, 남종구, 김약연, 김하규 등이 이끄는 스물두 집의 식구들을 포함하여 모두 142명이었다.
원래는 유학사상에 젖었지만 실학의 바탕 아래 자립과 개척정신을 지녔고, 자녀 교육과 민족의 독립을 생각하며 도강했던 창조적인 소수였다. 이주민 가운데는 문재린의 평생 반려자로 ‘고만녜’ 라고 불리던 김신묵도 끼여있었다. 둘은 1911년 4월 7일에 결혼했다.
이들 이민자들은 진취적이고 교육열이 높은 선각자들이었고 또한 민족증흥을 생각하는 애국자들이었다. 자녀들을 위해 고민 끝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신앙을 토대로 민족의 자주 독립, 평등과 자유, 일제에 대한 항거 운동을 그곳 젊은이들의 삶의 원동력으로 삼게 했다. 김약연 윤동주 나운규 김재준 송몽규 문익환 등이 명동 출신이다.
문재린은 1914년 격동기 한국 근대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명동학교 중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베이징으로 유학한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주선으로 칭다오에 위치한 독일계 기술전문학교 의학부에서 의술을 전공했지만 학교가 폐교된 이후 베이징 국립고등사범학교 단급과를 졸업하고 1917년 북간도로 귀환한다.
독립운동 와중에 캐나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토론토로 유학
문재린은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을 계기로 국민회 조직에 가담한다. 이후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도중에 일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22년에 북간도 명동교회 장로로 피선되었으며 1926년까지 평안남도 평양신학교에 재학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북간도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1928년부터 3년 반 동안 캐나다 토론토대 이메뉴얼 칼리지(신학교)로 유학한다. 한인 최초의 캐나다 유학생이 된 것이다.
그를 후원한 사람들은 동만주 북간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캐나다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북간도 한인 개척자들이 일제와 중국의 압박,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속에서 신앙을 유지할 수있도록 물심양면 도움을 주었다.
1920년대 재정난으로 많은 학교들이 폐교되었지만, 캐나다선교회가 경영한 은진중학교와 명신여자중․소학교는 계속 운영되어 교인 자녀들이 그 지역에 남아있을 수 있게 했다.
당시 캐나다 연합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력도 간과할 수없다. 문재린이 성장했던 북간도에서 그들은 단순한 선교를 넘어 한민족을 깊이 이해하고 자립·자존하도록 돕는 등 교육자요 후원자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캐나다 연합교회의 사상적 개방성과 수용성은 일제 강점기에 대쪽같이 곧은 용정의 지도자들을 타협노선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렇지만 1940년대 초에 시작된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용정 지역의 한인 주민들은 여러가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명동학교도 한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었고, 급기야 폐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문재린이 캐나다로 유학간뒤 나머지 일들은 모두 김신묵 여사가 도맡았다. 그녀는 북간도에 남아 교회 일과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잔다르크’란 별명까지 얻었고, 훗날 토론토 한인회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캐나다 유학을 마친 문재린은 일본 요코하마행 배를 타고 대서양을 경유해 귀국하는데, 그 떄 그는 1930년대 한국인의 눈에 비친 유럽과 중동, 서인도 등의 풍물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한 글을 남겼다.
캐나다에서 귀국한 그는 용정에서 중앙교회 담임을 맡는다. 당시 교회 권속들이 시험 삼아 3년만 맡기려다 14년이나 붙들어 두었다. 북간도의 어머니교회로 일컫는 용정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그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장례를 집례하기도 했다.
문 목사의 5가지 신앙적 결심, 즉 ‘심령의 양식이 되는 성서를 매일 한 장씩 읽자’ / ‘매일 한 번씩 기도를 올리자’ / ‘주일을 성스럽게 지키자’ / ‘십일조를 정성스럽게 올리자’ / ‘1년에 최소 한 사람씩 교회에 인도하자’는 오늘을 사는 기독교 신앙인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 운동’도 문목사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을 계기로 가족들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공산당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그 뒤 연안에서 활동했던 옛 제자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불과 20여일 만에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문재린은 사형 또는 소련으로 압송될 위기에 처했지만 나중에 석방되었다.
월남한 이후에 1948년까지 서울 금천 황금동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으며 지교회 설립, 중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서울 신암교회에서 교회당 건립을 구상했지만 한국 전쟁을 계기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제주도 교회연합회 총무를 역임하던 동안에는 피난민 구제 사업에 참여했고 경상남도 거제도에서도 피난민 구제 사업, 피난민 정착촌 건립 사업에 참여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60년대를 지나면서, 두 부부는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1953년 11월부터 1955년 6월까지 강원도에서 교세 확장에 나섰으며 1955년 2월 20일에는 서울 중구 필동에 한빛교회를 설립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대구 한남신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농촌 목회자를 양성했다.
그가 행한 설교들은 개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해방 후에도 그들을 붙들어 주었지만 문재린은 기본적으로 북간도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 민족의 독립과 중흥을 추구하던 반골의 파이어니어였다.
그에 따라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민족 운동, 인권 운동, 노동 운동, 그리고 평화통일 운동을 강조하게 되고 문익환 문동환 두 아들 목사와 함께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갖게된다.
1971년 12월 21일, 나이가 들어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는 고국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 이른바 이민사회 속에 살게 된 것이다. 1973년에는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칼리지 산하 이매뉴얼 신학교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두 부부는 ‘토론토 한국노인회’와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를 결성했다.. 처음에는 친목단체의 성격이었으나 차츰 민주화 투쟁을 위한 성격으로 바꾸어 갔다.
이에따라 한인회와의 갈등이 시작되고 한인 교포사회의 좌우 편가르기와 불화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지난 1989년 그의 장남 문익환목사가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격하게 포옹하는 장면을 본 많은 국민들이 남한 정부는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의 자유등 기본 인권을 짓밟고 있는 최악의 독재자 김일성을 친구처럼 대하는 모습에 비판과 분노를 표시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문재린목사 캘거리 교회 태동 산파역
캐나다로 이민온 다음해 1972년, 캐나다 연합 교회 총회가 애드먼튼에서 열리고 문재린 목사가 초청 강사로 왔다. 이때 캘거리에 한인교회가 시작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친척인 문형린씨와 함께 양재설씨 댁을 방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인교회 설립을 희망했던 양재설씨는 연락을 할 수 있는 캘거리 한국 교민 모두에게 연락을 했다. 10월 15일 오후 1시 St. Andrew United Church에서 전 캘거리 한인들이 모인 가운데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문목사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읽고 설교를 한뒤 “캘거리 한인교회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 “좋은 사람 손들라”고 했다. 모두가 손을 들었다.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도 찬성을 했다. 그렇게 해서 캘거리에 한인교회가 시작되었다.(양재설씨 기록에서)
1981년 4월 2일에 자신의 아내,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 목사는 78년 고국을 다녀간 뒤 미국·캐나다 등지에서 반정부 활동을 편다는 이유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정부의 국민 대화합 정책에 따라 귀국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85년 12월 29일에 서울에 위치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8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녀들이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란 회고록을 2006을 발간해 조부모를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