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공교육에서는 지난 60년 동안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s)와 진보주의자(progressives) 사이의 논란이 계속됐다.
이런 논란은 학자들의 토론 탁자 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육 현장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 가볍지 않다.
양측에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교과 과정이 표준화되어야 하는가? ▲학교는 표준화된 기준에 따라 평가 및 시험을 치러야 하나? ▲학부모가 자녀의 학교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하는가?
위 세 가지 물음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하면 당신은 전통주의자이다. 만약 ‘아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진보주의자다.
대부분 교사 양성 프로그램은 급진적 진보 성향에 기반을 두고 예비 교사들을 배출해왔다. 또한, 교원노조는 진보주의를 바탕으로 이익을 위해 협상과 파업까지 벌여왔다.
진보적 시각은 카를 마르크스와 추종자들의 글에서 시작됐다. 오늘날 이런 관점을 ‘비판 이론’ ‘비판적 인종 이론’ ‘비판적 성별론’ 또는 더욱 넓게는 ‘구성주의’라고 부른다.
이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 중 하나에 속한다. 또한,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차별하고 착취한다고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주장한다.
교육에서 논쟁은 좀 더 복잡하다. 진보주의 교육자들은 민주주의가 가르침과 배움의 기본이고, 학생들을 노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교실이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해야 캐나다를 모든 사람이 평등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각 교사는 과거에 당연시했던 교단 위의 현자가 아닌,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교사보다 더 큰 발언권을 가진다. 실제 일부 교실에서 교사는 뒤에 물러나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관심 있는 자료를 가르치고 성적을 매기고 성적표도 결정한다.
게다가 교육부가 커리큘럼 내용을 의무화하지 않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종종 교사가 의무화된 내용을 가르치지 않을 때도 있다.
캐나다 공립학교에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으로 학생들에게 차별을 인식시키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다른 계층으로 분류된다. 이때 정체성을 나타내는 특성이 많을수록 더 많은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받고, 흑인이 백인보다 차별받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보다 차별을 받는데, 이런 특성이 중복된 흑인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 이중삼중의 차별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빚어진다. 차별을 받는 특성이 더 많을수록 관심과 특권을 가질 권리가 있고 자기 의사를 더 많이 표현할 권리도 가진다. 차별받은 그룹은 높은 평가를 받지만 차별하는 그룹은 평가 절하된다.
이때, 학생들은 특정 그룹의 일원으로서 생활하며 얻는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데, 이런 지식은 그룹 내에서 ‘진실’로 여겨지며 다른 그룹과는 공유되지 않는다. 즉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이 내린 결정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해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가치관을 ‘남들은 모르는 통찰과 지혜’로 여기고 다른 외부 그룹과는 단절된 세상을 산다. 이는 어떤 고등학생들이 “흑인 여성으로서” 혹은 “두 젠더의 정체성(Two-Spirit)을 지닌 원주민 여성으로서”라며 자기주장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이러한 주장은 차별받음에도 위계질서가 있다는 이념적 주장을 담고 있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장치다. 즉 많이 차별받으니 내가 더 우월하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런데 자기주장을 이렇게 시작하면 화자의 정체성을 주장의 논거와 섞어버리게 된다. “내 주장은 사실이며 매우 특별하다. 왜냐면 나는 차별받는 계층이기 때문이다”라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학생들에게 다른 그룹에 속한 학생 혹은 교사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그 학생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 혹은 폭력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차별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만약 누군가 이런 ‘차별받는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 오류를 지적하면, 화자는 인종·성별이나 다른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차별받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 즉 ‘진실’이 폄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흑인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주장을 펼쳤을 때, 백인이 반박하면 ‘인종차별’로, 흑인 남성이 지적하면 ‘성차별’, 흑인 여성이 반박하면 ‘동성애자 차별’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따라서 캐나다 교육 현장에서 ‘진실’은 더 이상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는 가치들이 근본적 가치를 이룬다. 하지만 점점 ‘진실’은 모든 학생이 아닌, 특정 집단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념적 주장이 범람하면서 캐나다 공교육은 보편적 진리를 희생해 왔다.
캐나다 매체 위니펙 프리 프레스는 지난 3월 “학교 수업은 질문, 프로젝트, 학생들의 의견 발표와 선택과 유행어로 가득 찼다”고 보도했다.
캐나다 매니토바주 로레트의 학교 교사 캘리 맥루어는 “(과거에는) 교사 주도였지만 지금(수업)은 학생 주도다. 탐구 수업은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교사들이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위니펙의 중학교 교사인 게렛 코츠는 “올해 학생들은 셰익스피어의 고전보다 스릴러 소설이나 자전적 이야기를 (교재로) 선호했다”고 밝혔다.
이는 수업 커리큘럼을 학생들이 결정하고, 교사들은 이에 부응할 뿐 담당 과목의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나다 교육부에서도 교과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고, 교사들은 교과과정을 확실히 가르치는지 감사받지 않는다.
이렇게 60년 동안 진행된 공교육의 진보주의적 변화는 ‘학생에게 가르칠 표준 커리큘럼이 없다면 이를 과연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학교가 개인의 행복 추구 과정이라면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는지, 필요한 훈련이 결여된 학생들을 ‘졸업생’으로 배출할 수 있는지 등도 의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진보주의 교육자들은 캐나다 공립학교를 둘러싼 교육 전쟁에 승리해왔다. 교육 표준화에 따르는 전통주의자들은 학생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일정한 교육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은 진급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재 진보주의자들에게 묵살되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교육이 타락했고, 교권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교육자들은 교육과정과 시험과 같은 학생들에 대한 공식적 평가, 교사들의 전문성에 대한 인정과 권한 위임, 교육학과에 대한 책임감이 교육 현장에서 재정립돼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육자들만으로는 이를 이룰 수 없다. 납세자, 고용주, 학교 밖 교육기관과 대중의 지원이 필요하다. 시민들이 교육 전쟁을 인식하고 동참하기를 희망한다. 우리 학생들과 나라가 위태롭다.
로드니 A. 클리프턴 (매니토바 대학 명예교수 겸 프런티어 공공정책센터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