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과 약속 “절대 상처 주지 않겠다”-이성기씨 자서전 ‘절망의 덫에서’ (2)

탁아소서 아빠 기다리며 창밖만 보던 두 딸

 봉제인형 사업을 그만둔 뒤 생활하기가 어려워  우리 부부는 팔을 걷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다운타운에 있는 우드워드 백화점에서 빌딩 청소를, 나는 같은 백화점에서 야간 경비 일을 하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생활했다.

 우리는 코퀴틀람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어린 두 딸을 코퀴틀람에 있는 탁아소에 맡기고 일을 다녔다’ 우리 부부는 거의 같은 시간대에 근무했는데 퇴근 시간은 내가 조금 빠르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러 유아원으로 가는 것은 내가 맡았다 .

두 딸은 내가 데리러 가는 그 시간에 맞춰 언제나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 모습이 저만치 나타나면 두 딸은 미친 듯 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선하다. 

 아마 아침부터 내가 유아원에 모습을 보이는 오후 그 시간까지 창턱에 얼굴을 올린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른 다른 어린이들과 섞여 놀지 못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Care Taker( 돌보는 사람)이 관심 있게 돌봐주지 않아서였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두 딸을 안어려 하면 널 구린 냄새가 풍겼다. 기저귀를 벗겨보면 하루 한 번도 갈아 주지 않아 오줌과 똥이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보니 자연 엉덩이 피부가 빨갛게 변하거나 짓무르지기도 했다.

 그 점을 지적하며 직원과 늘 다툼으로 시작해 말다툼으로 끝났다. Care Taker는 백인 아가씨였는데 내 불평에 콧방귀만 뀌었다. 아니 자신의 방식이 싫으면 데리고 오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되레 짜증을 냈다. 이런 작은 일에서부터 이민자 동양인의 설움이 복받쳐 오르기도 했다.

 두 딸은 이른 아침 일찍 깨워서 옷을 입히면 탁아소에 가는 줄 알고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두 딸을 학원으로 데려다 놓고 나오면 슬픈 울음소리가 내 발목을 잡아 그럴 때 나 역시 하염 없이 울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나를 기다리는 두 딸의 모습을 보면 그냥 눈물이 주르르 .두 딸을 안고 탁아소 밖에 나오면 어찌나 좋아하는지 내 목을 안고 이제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밴쿠버 우드워드 스토어.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천사 같은 두 딸을 위해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것이 있다. 절대 상처 주지 않을 것이며 잘 먹이고 잘 입히는것,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나는이 약속을 지켜라 인생은 45년 온몸을 던져 일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백화점 경비원 시절 경비는 육체노동이 아니라 비교적 쉬운 일이었지만 야간 근무를 할 때는 좀 으시시 하기도 했다. 밤새껏 혼자 7층이나 되는 건물을 걸어서 오르내리며 건물 구석구석을 점검하게 해야 되니 때로는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또한 딱딱한 바닥을 쉴새없이 걷고 또 계단을 오르내리는 바람에 발바닥이 많이 부어서 통증때문에 걷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덩치큰 인디언 건달 물리쳐 회장 몸비서 되다

 그뿐 아니라 아침 9시에 백화점 문을 열면 백화점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오는 틈에 끼어 도둑질하는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우드워드 백화점 위치에 마약쟁이들, 술주정하는 원주민들 그리고 전과가 있는 범죄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는 아침 7시 정각에 맞춰 직원들이 출근하도록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남녀 직원들이 쏟아져 돌아왔다. 그 틈에 섞여 들어오는 도둑을 찾아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밤새 뜬눈으로 경비 하느라 피곤한 눈을 부릅 뜨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최구가 엄청나게 크고 인상이 좋지 않은 인디안 남자가 직원들 사이에 섞여 들어왔다 얼른 인파를 헤치고 가서 그 사람을 불러 세우고 어느 부서에서 일하느냐며 직원 증을 보자고 했다. 인디언 남자에게는 악취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인디안 남자는 험상궂은 인상을 쓰며 큰 덩치를 밀고 들어왔다. 나도 질세라 밀어냈다. 그러자 인디안 남자가 몸을 피하면서 “Don’t fucking men (밀지마 짜샤)”라고 고함을 질렀다. 계속 몸싸움을 하고 밀치는 와중에서 백화점 직원들 누구 하나도 도우려 하거나 말릴 생각도 않고 구경만 했다. 그때 옆을 힐껏 보니 저만치 떨어진 데서 백화점 회장인 Chunky Woodward씨가 보였다. 트렌치 코트를 입은 그 역시 내가 몸싸움 하고 있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쏟아 났는지 그 큰 덩치의 인디언에게  헤딩을 했다. 순간적으로 사내는 신음 소리도 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구경꾼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인디언 남자는 바닥에 잠시 있다니 군소리 없이 도망을 쳤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니 이마가 부풀어올랐다. 머리가 띵한 것이 그제서야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려는데 경비 책임자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대답 대신 나를 7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Woodward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은 칭찬을 하면tj 내일부터는 사무실을 지키라고 했다.

 회장이 백화점을 오는 것은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였다 때문에 그가 올 때만 바싹 신경을 쓰면 되는 아주 편한 업무였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너무 편해서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장이 백화점을 오는 날만 기다리는 몸종과 다름없었다. 내가이 짓을 하려고 머나먼 캐나다까지 이민을 왔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2개월 동안의 경비를 그만두었다. 주위 사람들 중에는 편한 일을 왜 그만두느냐는 말도했다.하지만 나에겐 몸이 고되더라도 미래가 보이는 직장이 필요했다.

 구세주를 만나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되어서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집에 가니 아내는 일 다녀와서 파김치가 되어 애들과 떨어져 자고 있었다. 돈이 없으니 아무런 대책도 없고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직장을 구하러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다가 다 리치몬드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 에서 회사들을 기웃거리던 중 어느 공장 앞 지나는데 정문에서 경리를 뽑는다는 조그만 방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일단 사무실로 가서 직장을 구한다고 했더니 경리를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로서는 당장 무슨 일자리라도 구해야 하기 때문에 나 급하게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바로 채용을 결정한처럼 나를 데리고 공장 내부를 보여 줬다. 수백 명이 앉아서 만드는 것은 어망이었다. 공장을 둘러본 후 경리부장 자리 앞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경리 부장은 중년의 백인 여성이었다. 내가 책상 앞에 앉자마자 경리부정은 서류와  경리장부를 내밀면서 봉급 계산을 한 뒤 수표를 발급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별다른 훈련도 시키지 않고 그런 일을 시키니 막막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경험 있는 경리는 훈련 없이도 경리장부 만 보고 그런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할 줄을 몰라 그저 서류를 지척이고 몇 시간을 땀범벅이 되도록 경리부장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경리부장이 사장실로 들어가 약 10분 동안 있더니 사장실로 오라고 했다. 사장은 30대중반의 나이로 보였다. 얼굴이 순하게 생긴 미남형이었는데 나를 자리에 앉게 한 뒤 땀을 딱도록 휴지를 건내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캐나다에 이민온 동기는 무엇이며 한국에서 무슨 일에 종사했고, 가족 사항은 어찌 되는지 꼬치꼬치 깨물었다. 그리고 경리 경험이 없는데 속였느나며 따져물었다.

‘절망의 덫’저자 밴쿠버 이성기씨

 나는 진심어린 호소를 했다. 어린 딸이 둘이나 있고 수중에는 돈이 떨어진데다가 지금 허기가 져서 죽을 지경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며. 그만 울컥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장은 억지나 다름없는 나의 별명을 다 듣고 한참 쳐다보더니 서류 하나를 꺼네 아무 말 없이 뭔가를 적었다.  뭔지는 몰랐지만 나는 일이 꼬여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이 나한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장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사연을 들으니 오래전 우리 가족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이곳 캐나다로 이민 왔을 때 우리 형제와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고생하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했다.

  봉투 속엔 한 달분 월급과 UIC (un employment insurance claim) 실업수당 신청 할 수 있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UICc는 3개월 이상 그 회사에 재직한 근로자가 회사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실직했을 때 다른 직장을 구할 때까지 생계유지 차원에서 지원하는 수당이었다.. 그때 그 UIC가 무슨 용도인지도 몰랐다. 사장은 봉투를 나의 손에 쥐어 주며 이것으로 6개월 정도 생활에 도움이 될 테니 다른 공부를 해보라고 격려해줬다.

 구세주가 바로 여기 있구나 싶었다. 나는 얼른 그 사장이 손을 잡고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쾌재를 부르며 공장에서 나왔다. 사장은 사무실 사장은 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나를 배웅했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되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구해 행복한 이민생활을 하라는 말까지 하며 멀어진 나에게 흐뭇한 미소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느정도 먹고 사니 그 공장을 찾았지만 이미 없어진 후였다 은공을 갚지 못해 빚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사장과 나이지리아서 나이 탈출을 도와준 아이리스 신부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분들의 생사를 차도 모르는게 안타깝다. (계속)

C&K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