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두 시간씩 걷고 유튜브도 보죠” – 활기넘치는 95세 캘거리 조정규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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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체구에 걷는 모습만 봐도 단단함과 건강함이 느껴진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말뿐만 아니라 표정도 인근 맥두걸 공원에 핀 연분홍 꽃처럼 밝다.

 캘거리 동물원에서 멀지않은 실베라 시니어 하우스 뒷뜰에서 만난 조정규 (趙貞圭)여사.

 1925년생이니까 올해 95세. 백세시대라는 것을 절감한다.

60명이 거주하는 시니어 하우스에서 최고령이지만 가장 젊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걸을 때 미는 워커를 사용하지만 조여사는 그냥 날아다닌다.  아침 7시 반에 바로 옆 맥두걸 공원으로 나가 한시간 정도 걷고 저녁 식사 후에 또 산책을 나간다. 10년 전 캘거리로 온 이후의 일상이다.

이전 토론토에 있을 때도 호수가 산책로를 따라 많이 걸었다. 그래서 병이 찾아올 틈이 없었던 것같다. 알버타저널 신문 칼럼을 읽고 비판할 정도로 정신도 맑다.   

선천적으로 밝은 성격을 지녀서인지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고 하신다. 미운 사람도 없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있느냐”며 신기해 한단다.

 그러나 알고보면 조여사의 일생은 많은 굴곡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제시대, 해방, 6,25동란 등 현대 한국사의 험한 파고를 넘어야했고  뒤늦은 결혼과 급작스러운 사별, 네 자녀 교육 그리고 캐나다 이민 등 만만찮은 질고를 이겨내야 했다.

 조여사에게 결코 짧지 않은 당신의 삶에 관해 여쭈어보았다.

조용순 전 대법원장이 큰아버지, 조완규 전 서울대총장 교육부장관이 사촌동생

-성명이 반듯합니다. 여자들의 이름이 ‘간난이’ ‘복순이’ 등으로 아무렇게나 지어졌던 시기에 태어났을 텐데요. 구글 검색을 해보니 쌍토 규()는 ‘고대에 제왕, 제후가 예절과 예식을 거행할 때 손에 집어 들었던 일종의 옥기’로 되어있습니다.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같습니다.

“한밭(대전)에서 태어났고 임천 조씨 ( 林川 趙氏)입니다. 장녀라서 그랬는지 항렬인 ‘규’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어요. 큰아버지가 법무부장관과 제 2대 대법원장을 지낸 조용순씨입니다. 또 큰집 사촌동생 조완규가 서울대총장 교육부장관을 지냈으니 대전에선 큰  집안이라고 할 수있지요. 청빈한 큰아버지는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세 끼 드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셨습니다. 점심을 걸렀을 정도입니다. 어머니는 “불평하지 말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 행(幸)이 따른다”고도 강조하셨고요.

-일제시대였는데 결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는 18살만 되어도 ‘늦었다’며 부모들이 큰일이라도 난듯 결혼을 채근하던 때였습니다. 대전여고 다니는데 아버지가 결혼해야된다며 학교를 그만두라 해서 방문에 못을 치고 죽는다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결혼이 싫었습니다. 결국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갔는데  그바람에 아버지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갖지못했지요.

 결혼은 서른 넘어 했습니다. 집안 언니 소개로 선을 보았는데 세살, 두살반 애가 둘 딸린 홀아비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젖먹이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속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사람이 아이들 때문인지 선보는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결혼은 싫은데 이상하게 애들은 키우고 싶었어요. 애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혼했고 그 아이들을 내가 낳은 애들처럼 키웠습니다. 기저귀 가는 것도 식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했는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남편 반대에도 애들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결혼전에 내가 모았던 돈도 썼습니다. 다행히 애들이 잘 따라주어 큰아들은 하바드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6.25사변 때 고생하지 않았나요?

“서울에서 대전 집으로 급히 내려왔는데 가족들은 남으로 피난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혼자 남기로 했습니다. 겁도 없었지요. 우리집이 크고 양식들이 많이 남아있어 인민군들이 집을 점거했습니다. 곡간을 열어주고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인민군들도 사람들이었어요. 

한번은 큰집이 궁금해서 가보았는데 그곳도 인민군들이 점거해 있었고  쌀가마니가 가득 있었습니다. 청빈한 큰아버지는 두가마 이상 집에 들인 적이 없어 의아해 했습니다. 인민군들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큰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떻든 전란 중에도 재미있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서른 넘어 결혼하고 40세에 첫 애 낳았는데 이듬해 사별

-여사님이 낳은 자식도 있나요?

“나이 40에 애가 생겼습니다. 집안에서 모두 경사라며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애가 돌을 지나고 얼마 되지않아 남편이 병으로 먼저 가버렸습니다. 한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는데–. 그 늦둥이가 국민학교 때 캐나다로 이민왔습니다. 

막내가 자동차사업 관계로 10년 전 캘거리로 와서 따라왔는데 다시  BC주 빅토리아로 옮겨가버렸습니다. 따라가자고 하는데 그냥 캘거리에 남기로 했습니다. 한번씩 가서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큰 딸은 영국으로 이사갔는데 거기도 한번씩 갔다왔다 했습니다. 어제도 영국 딸과 통화했습니다. 

캘거리가 겨울이 춥고 긴데 그래도 좋은 도시입니다. 지금 있는 노인 아파트는 식사도 하루 두번 제공하고 하루 네번씩 건강체크와 청소 등을 해주고 깨끗합니다. 노인복지는 캘거리만큼 좋은 곳이 없을 겁니다. 막내와는 아침 저녁으로 전화통화를 합니다. 

-캐나다 이민은 어떻게?

“큰 딸이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캐나다로 이민왔습니다. 딸을 보러 한번 토론토로 다니러 왔는데  이후 큰딸이 계속 함께 살자고 졸라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큰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꺼렸는데 결국 1975년에 이민왔습니다. 

토론토에 한국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도시도 크고 아름답고 사람들도 좋고. 나는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데로  좋은 이민 생활을 할 수있었습니다.

-여기 시니어 커뮤니티는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전에는 다운타운 프린스아일랜드 인근 아파트에서 밥해 먹고 보우강변을 많이 걸었는데 어느 겨울 뭔까 깜박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경찰이 집으로 라이드를 주었습니다. 이후 복지관계자들이 의논해 저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다며 식사가 제공되는 이곳으로 옮겨주었습니다.”

-어떻게 소일합니까?

“그냥 왔다 갔다 바쁩니다. 아침 저녁 두 차례 한시간 이상 걷습니다. 또 하루 두번 식사시간이 있습니다. 애들과 매일 통화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엔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곤합니다.  캘거리한인노인회 모임에도 어쩌다 참가하는데 라이드를 받아야합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갈 수도 없고요.

한국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한번씩 컵라면을 끓여 먹으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같습니다.

-캘거리 한인 가운데 최고령이 아닐까도 생각되는데요. 참 건강하십니다. 많이 걸으시면서도 어떤 비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엔 걸으면서 체조도 하고 무엇을 들기도 하고 했는데 요즘은 그냥 걷습니다. 교회가 있는 언덕쪽으로도 올라가 돌아오고요. 지난 한달은 공원의 꽃들이 만발해있어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물결치는대로 살아왔지만 항상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된 것같습니다. ( Yul Kim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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