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민 수속, 부친 반대, 병무청 위세 넘고 ‘가나다’로 -양재설의 ‘약속의 땅 가나안’ 1편

8.15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문교부에서 세계지리 부도란 교과서를 발간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 살던 나는 내 나이 또래인 사촌 형제들과 이 책을 가지고 나라와 수도 이름을 찾는 놀이를 했다.

 우리들은 처음 보는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어 했다. 한글로 표시된 발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가나다’ (캐나다)라는 나라였다. 우리들은 무슨 나라 이름이 ‘가나다라마바사’라며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이 있었다.

1966년 캐나다는 문호개방정책을 세우고 유색 인종에게도 이민을 허용했고 파주에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던 나도 그 사실을 알게되었다.

내가 특수설계 연구소 철도교량 설계 팀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동료 기술자들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월남 또는 보르네오 사라와크 등으로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신청하자고 권유하는 친구도 있었다.

 당시 나는 위장병으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월남은 전쟁중이었고 보르네오와 사라와크는 열대성기후 때문에 몸이 약한 내가 잘 적응할 것 같지 않아서 거절 한 바 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달랐다. 그 때 들은 소문으로는 캐나다는 미국과 인접해 있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실업 의료 등 각종 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실직하면 생활비가, 아파 입원을 해도 치료비가 보험회사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캐나다는 사회보장제도가 당시 한국 사정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였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로 갈 것으로 정하고 홍콩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 한문과 영문으로 작성된 이민 신청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캐나다로 이민 온 이후 1975년 Mica Creek에서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그런데 3, 4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아마도 캐나다에서 나 같은 사람은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캐나다 이민에 관해 거의 잊고 있을 때 이번엔 일본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그동안 홍콩에 있던 캐나다 영사관이 일본으로 옮겨 영사업무를 그곳에서 취급하고 종로 3가에 있는 YWCA 2층에서 면접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면접한 사람은 이름 학력 경력 가족관계를 다시 확인한 다음 캐나다 어느 도시로 가기를 원하는 가를 대뜸  물었다. 나는 캐나다 이민을 허락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도 캐나다 영사관에서는 6개월 동안 나에 관해서 모든 조사를 하고 면접을 통해서 특별히 부적합한 이유가 없는 한 이민을 하기로 결정하고 면접을 했던 것 같다.

 면접관은 나에게 준비된 그래프를 내놓았다. 그래프 하단 가로에 캐나다 주요 도시 이름이 적혀 있고  세로에는 Civil Engineer (토목기사) 가 필요한 숫자와 현재 있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 그래프를 보니 어느 도시에 Civil Engineer가 많이 필요한 지가 나와있었다. 면접관은 토목기사가 부족한 캘거리로 가면 좋겠다고 권유했고 나도 동의했다..

  캐나다 캘거리로 이민 갈 것을 마음먹고 제일 먼저 영등포에 사시는 부모님께 이 소식을 알렸다. 나는 당연히 찬성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잠깐 생각을 하시는 하시더니 이민을 반대 하신다고 하셨다.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아들 하나를 잃어 버리는 것 같다는 것. 둘째는 캐나다라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라고 하던데 그런 나라의 가면 바닥에서 고생하며 살 것이 뻔한데 그렇게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살면 당신이 일궈놓은 경제적 기반도 있고 나는 또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도 있으니 적어도 중류급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반대 그리고 집 사람의 임신 때문에 1967년말 캐나다로 떠난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나의 이민 계획은 당분간 보류 상태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68년 1월에 북한에서 일개 소대병력이 박정희대통령의 목을 벨 목적으로 남파한 소위 ‘김신조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분위기가 험악해 곧 6.25와 같은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위압감이 돌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셨다. 미리 피난가는 셈치고 가려면 가라고 허락하셨다.

1960년대 김포공항. 당시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도 어려웠다.

 이민 소속을 밟기 위해  필요한 서류 하나가 군복무 확인 증명서였다. 파주에서 새벽 5시 첫 버스를 타고 서울 병사구 사령부에 도착하니 담당 직원은 서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음 주에 와 보슈” 하는 것이었다. 허탈했다. 새벽 첫 차로 여기까지 왔는데 무조건 다음 주에 와 보라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 했으나 그 사람은 다른 서류들을 들어보이며 “순서대로 할 거 아닙니까”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불렀다.

 나는 “주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를 도와주세요”하며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옆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상사인듯한 사람이 나와 “어이 양재만이거 어디 있어” 하면서 방금 직원이 밀쳐놓은 내 서류를 집었다. 양재만이가 아니고 양재설이니까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으라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구 너머로 소리쳤다. “ 여보세요 양재만이나 양재설이나 비슷한데 좋은 자리 있을 때 좀 봐 주시지요.” 그 사람이 나를 힐끗쳐다 보고는 “ 당신 오늘 운수 좋은 날인 줄 아쇼”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서류를 10분 만에 발급 받았다. 그런 서류들을 갖추고 드디어 1968년 4월 4일 김포공항을 떠나게 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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