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이유식 ‘44년 캐나다 이방인 뒤안길 ②
그림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인삼 제품을 만들어 백인사회에 파고들자는 생각으로 한국에 나갔다. 제약회사들 문을 두드렸으나 회사마다 신규 사업으로 인삼 뿌리를 제품으로 만들어주기를 껴려했다.
나의 의지가 꺾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면목동에 있는 신풍제약이라는 회사를 찾아가 장용택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실에서 캐나다 인삼 시장에 실패를 설명드리고 인삼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앙청을 했다.
신규 제품의 개발은 새로운 자본을 투자하여 공장 생산라인을 신설 또는 증설하는 문제, 신규사업에 성공 여부 등 회사로서는 어려운 결정 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 사장님은 부정적인 의견을 주셨지만 연구를 할 테니 다시 한번 와 달라는 약속을 받고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갔다. 사장님은 젊은이의 용기와 노력이 가상하고 신제품을 개척하고자 하는 조국애가 아름답다며 내가 제의한 제품을 견본용으로 만들어서 공급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신풍제약 사장, 용기가 가상하다며 제품개발 수용
제품은 파우더,. 타블렛 캡슐로 시작하기로 하고 개인수표 5천불을 지불했더니 웃으시며 이는 수표가 아니고 종이쪽지라고 하신다.
캐나다 은행의 머니오더 수표가 한국에 자기앞 수표와 같은데 머니오더가 아닌 개인 수표로 신제품 개발도 하고 제품을 수입하겠다 하니 이 얼마나 엉터리였겠나. 하지만 사장님은 나의 간절한 애원과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높히 평가하여 한국인삼을 제품화하여 북미에 판매한다는 나의 간청을 수용해주셨다.
이렇게 시작한 인삼제품 수입으로 처음으로 복미에 인삼 제품을 팔게되었다고 나는 자랑스러워했다. 그 이후 인삼 제품을 정식 무역절차로 L/C를 열고 수입을 계속하며 도소매를 겸한 시장개척을 해나갔다.
시장 개척 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 매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웨스트브룩이란 백화점 뒤편에 위치한 건강식품점을 매입했다. 이제 매장에 있으니 마음대로 도소매업을 겸할 수 있었다.
종업원 한 사람을 채용하고 나는 약국과 건강식품점을 순회하며 인삼 제품판매에 전력투구했다. 인삼이 좋다는 것은 백인들도 알고 있었기에 인삼 제품이 잘 팔렸던 것이다. 가게에 손님이 오면 내가 인삼제품 효능을 손짓 발짓을 하며 많이 팔았다.
이러다 보니 생약 전문가가 나타났다며 나에 대한 소문이 백인 사회에 전파가 되어 인삼 제품의 수입은 큰 성공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삼 뿌리로 백인들이 모르던 상품을 제품으로 만들어 팔자 한국의 국위를 높힌 일등공신이 된 양 내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신풍제약 장용택 사장님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를 드렸다.
여기서부터 나의 수입 제품은 다양화된다. 내륙인 우리 도시의 입장을 생각, 썩지않고 장기간 보유할 수 있는 소모품 중심으로 팔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제품 수입을 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베이스볼 모자, 가위, 신창, 쇼핑백, 도어록(Door Lock)등 장사가 될 것 같은 상품들을 수입해왔다.
건강식품점, 공병수거가게 잘 되자 백인들 매입 제의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건강식품점을 경영 한지 3년째 되는 어느 날 독일인 헬묻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나의 건강식품점을 구입하겠다는 제의을 했다. 처음에는 돈도 잘 벌려 가게를 매도할 뜻이 없다고 사양했었는데 메일 찾아와 가게를 사겠다고 통사정을 했다. 곰곰히 생각을 하니 만일 이 건강식품점을 판다면 현재 있는 재고 등을 합하여 3년 만에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현찰이 50만불이 족히 될 것같아 이분에게 가게를 매도했다. 그 시절 50만불의 현찰은 지금으로 200만불은 족히 되고 남으리라 하는 생각된다. 그 돈으로 더 큰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가게를 매도하고 공병수거 비즈니스를 사들였다.백인 종업원 6명을 채용하고 공병을 모아 놓으면 정부가 관리하는 회사에서 공병을 수거해가고 매 2주마다 대금을 결제해 주었다.이 고물장사를 2년여를 한 후 애드먼턴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다는 백인분이 찾아와 나의 가게를 매입하겠다 하여 좋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