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 보조, 캐비닛 일 너무 고달파 한겨울 그림 행상

-민초 이유식 ‘44년 캐나다 이방인의 뒤안길’①

주한 캐나다 이민 담당관은 “당신은 대한민국이 필요한 사람이지 캐나다에서는 필요치 않다”며 두 번의 면접에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세 번째 면접에서 “당신, 가는 날부터 후회할거야”  하면서 이민 허가를 해 주었다.

 1974년 7월 28일. 내 나이 34세. 임신 5개월의 처와 두살 된 딸 그리고 나 세 사람이 가진 것은 미화 600불이었다.  불타는 향학열이 있었다.  3년만 공부 더 하고 귀국하리라는 결심.

 캘거리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동서 형님 김창영 박사 댁에 여장을 풀었다. 막연하나마 캘거리대학에서 어떤 일이든 얻고 공부를 하리라는 나의 기대는 여장을 품는 날 저녁 바로 깨졌다. 동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무작정 동서 집에 머물면서 신세를 질 수도 없고 600불 전 재산은 400 불로 줄어들자 사흘째부터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뜻밖에 고등학교 때 선배 한분를 만나게 되어 선배가 용접공으로 일을 하는 도미니온 브리지라는 철강회사에서 밤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당 1불80전의 노가다였다. 용접 후에 남은 쇳물을 그라인딩이라는 머신으로 갈아서 매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그라인딩 용기가 너무 무거워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2주간 일을 했다.

쇳덩어리 추락으로 옆 노무자 즉사한 뒤 바로 그만둬

세번째 주가 시작되었을 때 옆 좌석에서 일을 하던 영국에서 온 노무자가 공중에서 쇳덩어리를 운반하는 크레인 작동의 부주의로 쇳덩어리가 공중에서 떨어져 즉사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날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동서 집에서 나와 방 두개짜리 월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월세 180불을 지불하고 식품비 전기세 가스세 등을 지불하고 나니 주머니에  80불이 남았다. 밤이 되면 아내 모르게 이불속에서 울었다.

 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메데리온 캐비닛 공장에 취업을 했다. 이 공장은 주로 전기톱으로 나무를 썰어서 책상과 의자 캐비넷 등을 만드는 열악한 중소기업이었다. 톱밥 가루와 먼지를 먹으면서  버는 시간당 2불50전의 돈으로 겨우 식품비와 월세를 지불할 수 있었다.

 12월 중순 그것도 무작정 그만두었다. 고려대학교 MBA 석사 학위를 받고 인천 I 대학에서 경영학원론과  마케팅 과목을 강의하던 내가 이런 막노동을 하다니 기가막혔다..

아내에게는 “나 직장 그만 두었소. 그러나 당신 배고프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며 겉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절박한 마음을 어느 누구도 모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해 12월은 몹시 추웠다. 오늘부터 행상을 한다는 각오였다. 고등학교 선배의 차를 싼 가격으로 살 수있었지만 휘발유값이 아까워 유화 12점을 둘둘 말아서 팔 밑에 끼고 행상에  나섰다.  이거리 저거리, 이가게 저가게를 찾아다녔다. 엉터리 콩글리쉬를 하면서 내 영어를 못 알아 듣는 사람에게 “당신이 한국말을 못하듯 내가 영어를 잘 할 수는 없다”고 설득했다.

그림 12 점은 한국에서 화방을 하는 육촌 동생이 “형! 이런 그림이 팔릴지? 어려울 때 한번 시장을 개척해보라며 준 선물이었다.

추운겨울 나선 그림행상 잘되자 인삼무역 구상

이 견본이 나의 행상 장사 상품의 시작이 되었다 조금씩 장사 수완도 늘고 돈도 벌게되어 동생에게서 좀 더 많은 양의 유화 수입을 할 수있었다. 그 후 이 유화 수입사업은 번창하여 서부 캐나다의 큰 디스트리뷰터가 되었다. 

여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무엇인가 국익이 되고 발전적인 사업이 될 수 있는 지 생각을 하며  시장조사에 나섰다. 중국 상가 등을 돌며 내린 결론은 인삼을 제품으로 만들어서 이곳 백인사회 파고들자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삼은 주로 중국 상가에서 뿌리로 팔렸다. 40개 인삼 뿌리가 담긴 한 박스가 25불 정도에 팔리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삼계탕 용으로 뿌리를 찾아서 먹기에 상품성이 없고 백인들에게는 생소한 상품이었다. 유화(그림 장사)로 모은 돈으로 인삼 제품을 만들어서 백인 사이를 파고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나갔다. 이민온 후 꼭 1년이 지난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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