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눈물을 흘리며 모함과 수모의 넝쿨에서

-민초 이유식, 캐나다 이방인의 뒤안길 ③

공부를 더 하겠다고 이민온 내가 이제 완전히 장사꾼이 되었다. 그때 나의 현실은 첫째도 둘째도 생업이었다. 처음 캘거리에 도착 했을 때 와이프는 임신 3개월이었는데 지금의 둘째 딸 경아를 얻었다.

그 시절 한인사회에서는 한사람이 구멍가게를 열어 장사가 잘되면 그 옆에 다른 한민이 와서 똑같은 가게를 오픈함으로써 둘다 모두  망하는 사례가 있었다. 한인끼리 서로 뜯어먹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서 캘거리 밖 사업체를  찾아다닌 결과 이곳에서 1시간 반 걸리는 조그만 타운 그라남 ( Granum)의 슈퍼마켓을 사들였다.

 백인 종업원 7명을 채용한 1만8천 sqft 큰 매장이었다 식품을 도소매하는 디스카운트 마켓이었다. 일요일과 월요일은 마켓 문을 열지 않는 지방에서 소문난 마켓을 35만불에 매입하고 3년 동안 자취를 하면서 장사를 했다.  마켓은 매일 1만5천불에서 2만불을 매상을 올려 정말 돈이 주머니에 쌓여가는 가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고향 사람이라고 오너캐리 해주었으나 엉망으로 끝나

지금까지 잘 나가던 나에게 악재가 왔다. 3년여를 가족과 떨어져 자취를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쳤다. 슈퍼마켓을 팔려 하니 50만불의 오퍼가 왔었다. 그런데 50만불이란 거금을 다운페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30만불만 선금으로 지불하고 잔액 20만불은 상가주인에게 이자를 주며 3년 또는 5년 뒤에  갚는 조건의 오퍼였다.  즉 이곳에서 상거래에 적용되는 Vendor Take back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생판 모르는 백인들에게 이렇게 사업체를 남기고 싶지 않아 한인들이 매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차에  P라는 사람이 자기 가족은 부인과 일을 할 수 있는 자녀가 네 사람이나 있으니 자기에게 기회를 달라고 사정을 해왔다.

 대구가 고향이라 봉화 두메산골의 내 고향과 같은 경북 사람이라 안심하고 정말 좋은 조건으로 사업체를 넘겼다. 조건은 그 사람이 갖고있다는  3만5천불을 받고 거기에 30만불에 대한 이자를 3년간 내고 40만불 원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매매를 했다 

  3개월간  마켓에서 판매에 대한 진실, 마켓 경영을 가르쳐 주면서 같이 근무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 사람은 한번도 못만져 보던 거금을 매일 손에 지니 정신없이 좋아하는 듯 했다. 

 나는 혼자서 백인 종업은 6 -7명을 고용하며 상가를 운영해서 짭짤하게 돈을 벌었으니 그 사람은 자체 가족 인력이 6명이나 되니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캘거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대로의 이런 생각은 1년 후 회한과 눈물과 모함으로 얼룩진 잘못된 판단으로 막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운영자금 10만불을 코사인을 해 준 것도 내가 떠안고 갚아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쌓여 있던 재고 20여만불 가운데 10여만불도 사라지고 없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이유식한테 사기를 당해 모든 것 다 잃고 이 도시에 살 수 없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때의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랴. 동포사회에 나를 사기꾼으로 악담과 모함을 퍼뜨리고 이곳을 떠난 것이다.  그 사람에게 받은 금전적 손실은 어마어마 했다.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멘붕상태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을 했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자는 각오로 마켓을 다시 맡아 경영을 했다. 1년 후에 그 사람이 갚지 않고 남겨놓은 은행빚 10만 불도 다 갚았다. 그리고 마트를 세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동산 사업으로 재테그  방향을 돌리다

 다행히  슈퍼마켓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도시의 중심가와 남버원 도로 선상에 있는 건물 세 개를 저렴하게 사들였다. 그리고 30년 후에 호텔을 개발하고자 하는 부동산을 세입자를 안고 사들였고 26 가구가 살아갈 수 있는 아파트를 매입하는 등 6개 빌딩과 마켓, 사무실 건물을 중심으로 다시 도약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재테크로 부동산을 사고파는 부동산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해가 바뀌어갈 때마다 회사의 자산은 증가되었다.

 로얄 트러스트라는 신용금고 회사에 매니저 버터 볼이라는 사람이 나를 아주 잘 본 덕분이었다. 1백만불 짜리 상가 건물을 매입할 때 10만불만 지불하면 90만불은 모기지를 주었다. 그분이 나를 잘 보게 된 것은 신용과 성실 때문이란 말을 하셨다.

 해마다 건물 하나씩 구입했는데 그분은 나를 만나면 “너 또 돈 얻으려 왔느냐”고 껄껄 웃으며 두말없이 모기지를 주었다. 나는 한 번도 실수 없이 계약된 내용대로 이자와 원금을 지불했다.

 나의 부동산 투자는 큰 실수 없이 성장기에는 68명의 세입자가 입주해있는 빌딩과 아파트 주택 등 많은 건물의 소유주가 되었다.

건물에서 땅에 대한 투자로 투자패턴을 바꾸다

 경영학에서 투자보수율이란 이론이 있다. 쉽게말해 투자에 대한 손익이 어떻게 나오냐를 말함이다. 즉 Input이 있으면 Output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제 내 나이도 60이 가까이 오고 이제는 투자만 할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재화에 대한 결실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 하나 간직하고 싶지않은 부동산부터 처분을 하고 이 처분된 재화로 땅에다가 투자를 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건물 위주의 투자에서 땅을 중심으로 하는 투자 패턴으로 바꿔 나간 것이다. 띵에 투자를 하면 셋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투자 전액의 현찰이 있어야 된다. 은퇴를 해도 은행 빚 걱정을 하지 않고 땅을 소유하게 되는 나의 계획은 적중을 했다.

손자 손녀 며눌아기 아들 딸과 함께 캘거리 마키야토 이태리 식당 밴치에서

 여기에 간단히 나의 투자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캐나다에서 제일 부자동네에 좋은 위치의 땅이 감정가 1,280만불로 경매 시장에 나왔다. 법원으로부터 현찰을 지불하고 이 땅을 매입했다. 물론 감정가보다 낮은 가격이지만 나의 오퍼는 현찰 지불이었기에  8명의 경쟁을 물리치고 내가 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인근 도시 등을 중심으로 3만평의 땅을 사들였다 이중 판매를 해서 매수금액 의 4배 이익을 내고 80만 불의 잉여세를 낸 적도 있다.

어쨌던 은행 빚이 없기에 걱정되는 일은 별로 없고 땅이 있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경기회복에 따라 상당한 현찰을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다운타운 호텔 건설의 개발 허가를 없고 이 프로젝트를 처분코자 했으나 경기둔화로 판매를 할 수 없어 많은 고심을 했었다. 205개의 객실에  20층에 건물을 지어 올린다는 처음 나의 계획이 불황의 경기 불황으로 달라졌다. 직접 건설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이 호텔 프로젝트 판매에 나서 1,600만이란 거금의 오퍼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은행에서 건축을 위한 모기지를 주지 않아 여러 번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연전에 알버타 정부의 후원하에 믿을 수 있는 대형 건설회사에서 매입코자 하기에 주겠다는 아주 저렴한 가격을 그대로 수용하고 팔아 치웠다. 

C&K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