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불짜리 세 얻고 구직위해 두달동안 뛰니 신발에 구멍 -양재설의 ‘약속의 땅 가나안’ 2편

1968년 4월 한국을 떠나기 전 미국경제협조처 (USOM)에 근무하는 친지로부터 캐나다에 가서 정착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우선 거처를 구할 때까지는 가장 싼 YMCA 호텔에 머물러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 맥도날드 성을 가진 사람 하고는 절대로 이해관계를 맺지 말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굉장히 짠 사람들이라 상대해서 이익이 될 것이 없다고 했다.

 집사람과 젖먹이 아들 석이를 Lethbridge 처남댁에 놔두고 나는 캘거리 다운타운에 있는 YMCA호텔 (지금은 없어졌음)에 머물면서 싼 방을 구하기로 했다.

1960년대 17가 모습

 신문을 사서 보니 가장 싸게 나온 것이 월 45불이고 다음은 75불이었다. 다른 집들은 150불 내지 250불 하였다.

 한국 정부에서 우리 가족이 이민가는데 지참 할 수 있게 허락된 액수는 성인 1인당 200불과 유아 150불 합쳐서 550불 정도였다.

 제일 싸게 난 두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쪽지에 적고 찾아나섰다. 가장 싸게 나온 집은 36 St, Mcleod Tr. 남쪽 근방에 있었다. 집  모양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가족을 가진 사람이 살 수 없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집 가운데로 통로로 만들고 양쪽으로 칸칸이 방을 만들어 독신자들에게 세를 놓고 있었다. 주인을 찾으니 양쪽에 있는 방문들이 열리면서 머리를 내미는데 머리가 헝클어진 마약 중독자 같은 사람들이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얼른 빠져나왔다.

 다음은 75불짜리 집을 찾기로 했다,이 집을 찾기 위해서는 Mcleod Tr.에서 17 Ave까지 되돌아와서  다시 서쪽 방향으로 16 St까지 가서 21 Ave를 찾아야 하는데 길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16a St,  21 Ave에 가서 집을 노크했다.

1960년대 캘거리 다운타운 전경

목마르고 배고파 할머니 주방 바나나가–

한 할머니가 나와 누구를 찾느냐 물었다. 셋집을 찾는다고 했더니 이 집에는 내가 아직 살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세를 놀 리 없다면서 친절하게 들어와서 말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걸어다녔는데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픈데 잘되었다 생각하고 할머니를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는 점심을 먹는 중인 듯 식탁에는 먹다 나는 샌드위치와 수프가 놓여있었고 식탁 중앙에는 바나나가 한 다발 놓여져 있었다. 만일 할머니가 인사 말이라도 바나나 하나 먹겠냐고 하면 염치 없이 불구하고 달라고 했을 것이었다. 

하필이면 Mcdanald씨집에 세 얻다

다시 찾아낸 16 St 집은 오래된 목조 2층 집이었다. Mcdonald 성을 가진 사람이 집 전체를 세 얻어서 아래층에 자기 식구들이 살고 2층을 방마다 세를 놓고 있었다. 2층에는 방이 세 개 있었는데 방 두개는  잠만 잘 수있게 되었고 내가 세를 얻으려는  방은 부엌이 달려있어서 음식을 해 먹게 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다른 방 사람들은 독신자였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 괜찮겠다고 생각되었다. 구식이지만 냉장고도 있고 전기스토브도 있어서 한국에 있을 때 19공탄 아궁이를 쓰는 것에 비하면 좋은 것이었다.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한국에서 들은대로 ManPower라는 곳을 찾아가서 상담했다. 나는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였고 교량설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담원은 나의 경력에 합당한 곳에서는 캐나다에서 경험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막일이라도 하겠다며 몇 군데 소개를 받고 찾아갔으나 막 일도 경험이 있어햐 하고 나 같은 

 엔지니어는 자기 직업을 찾으면 곧 나가 버리기 때문에 싫다고 했다.

다시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매일같이 자필 이력서 16 통을 각 회사에 보냈으나 허사였다. 이번엔 전화 번호에서 내가 구하는 직업과 관련한 회사를 집적 회사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2개월 이렇게 걸어다녔는데 한국을 떠날 때 새로 신고온 구두가 구멍이 나버렸다. 이제는 그야말로 유행가 가사처럼 돈도 떨어지고 신발도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겨우 학생용 아르바이트 자리 얻고 한숨 돌려

가장으로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 효력이 나타났다. Southern Alberta Gas Co.란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여름방학 동안 학생을 채용 하려고 하는데 학생이 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을 준다는데 너무 좋아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6월 1일은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보잘 것없는 임시직이었지만은 나에게는 대기업의 간부사원으로 취직된 것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C&K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