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이유식, 캐나다 이방인의 뒤안길 ④
생업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 이곳 한인 사회 몇 몇 인사들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한인동포라 해야 겨우 4, 500명 정도인데 누구나 돌아가면서 지역의 한인 회장 일을 해야 하니 동포사회를 위해 일을 좀 하라는 의견이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조국애와 동포애에 불타던 나는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곳 동포사회에서 역대 회장 중 제일 젊은 나이인 38세에 제 11대 캘거리 한인 회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1979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 이시던 한병기 주 캐나다 한국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회장, 우리 캐나다 한인 동포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 없으니 캐나다 전 교민을 대표로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회장이 서부 캐나다를 중심으로 애를 좀 써 주면 좋겠습니다”
이후 오타와에서 캐나다 전역 한인 회장들이 모여 캐나다 한인총연합회를 발족했다. 총회를 설립하기 위해 토론토의 강신봉 회장, 몬트리올의 박동열 장군 ( 해병대 예비역 소장 ), 오타와의 유태우 박사, 오타와 한인 회장 정종식 박사 그리고 서부 캐나다를 대표한 캘거리 이유식이 회칙 초안을 작성하여 총회에서 인준을 받게 했다.
1980년대 초반 초대회장인 오타와의 유태우 박사가 UN 유네스코 파리 담당관으로 가게 되었다. 후임 회장으로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의 강신봉 회장이 승계하게 되고 이때 나는 부회장으로 선임이 된다.
이어 3대 회장으로 토론토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윤여화 회장이 선출이 되고 뜻밖에 이 부족한 몸이 총연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윤여화 회장의 임기가 끝나고 제 4대 회장으로 몬트리올의 오기송 박사가 승계를 했다. 이어 오기송 회장의 임기가 끝이 나고 내가 제 5대 회장으로 선임이 되었다.
뜻밖에 한인총연 회장으로 피선되어 각종 활동
토론토에서 개최된 총연에서 내가 회장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변이었다. 그때까지 총연 회장 4대를 동부지역에서 배출했으니 이제는 서부 캐나다 차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선거일 하루 전 루이지애나 대학교수였던 권오율 박사가 서부 캐나다 회원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당신의 의견에 따른다는 동의하에 서부 캐나다 회원을 총연 회장으로 입후보 시킨다는 안을 내었다.
정말 능력도 준비도 없는 내가 그 다음날 총회에서 서부 캐나다를 대표하여 총연 회장에 입후보하게 되었다. 투표 결과 동부 캐나다의 전 회원이 나에게 투표해 주었다..
밴쿠버에서 입후보한 다른 한 분은 2표에 그쳤고 내가 참석회원 94명의 지지로 5대 회장에 션임되었다. 이때 전국의 캐나다 동포는 25만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어쨌거나 맡은 일이니 대의명분 있는 일과 사명감을 가지고 조국과 동포 사회의 길잡이가 되겠다며 심혈을 기울여 일을 했다.
조중훈 회장 만나 대한항공 캐나다 취항 필요성 역설
중요한 일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창립 회원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인총연합회를 각 지역 회장을 중심으로 거듭나는 단체로 만들고자 지역 회장들을 캘거리로 초청, 임시총회를 열어 회식을 바꿨다. 이 조치는 명실공히 총연이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가 되도록 하는 토대의 일환이었다.
둘째. 오타와 소수민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하여 이민 쿼타를 10만명에서 22만 명으로 늘리도록 연방정부 설득에 앞장섰다. 그 결과 우리 뜻대로 이민쿼터 수를 증가시켰다.
셋째. 해외 한인동포들을 한울타리로 묶는 단체를 만들었다. 일본 거류민단장 박병헌씨와 미주총연 회장인 조도식씨 그리고 본인이 1987년 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회합을 갖었다. 이어 박병헌 단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해 11월 일본 도쿄 신주쿠 미야코호텔에서 해외한인 동포 700명이 모여 한민족 대표자 협회의를 창립했다.
이때 회장에는 박병헌씨, 5인 부회장의 한 사람으로 본인도 선출되었다.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는 교민청을 설립해 줄 것을 끊임없이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중국 동포들의 국적 문제 등의 난제로 교민청을 대신해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는 모국의 동포재단이 설립될 때까지 미국 하와이 워싱턴,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캐나다 밴쿠버 그리고 일본 등지 상임운영위원회를 개최하고 해외 동포 7백50만명의 나아갈 길과 조국통일에 일조할 수있는 사업을 위한 토론을 꾸준히 가졌었다.
넷째. 캐나다 동포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한항공을 캐나다로 취항하는데 일조를 했다. 내용은 이렇다. 일본에서 한민족대표자회의 모임을 마친 뒤 우리 캐나다 대표단은 모국을 방문.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을 찾아뵙고 대한항공이 캐나다에 취항을 해야만 캐나다 동포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역설했다.
우리의 노력의 결과 한국과 캐나다 양국의 협조로 다음해 대한항공이 캐나다에 취향하게 된다. 조중훈 회장은 캐나다 한인총연을 잊지 않고 총연의 노력에 감사한다는 감사장을 보내왔다.
논설위원으로 썼던 컬럼 모아 ‘캐나다를 알자’ 책 출간
60이 넘으면 한인사회의 어떤 공직도 맡지않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제 지역 동포사회의 조직활동에 잘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60이 넘어서도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 찾은 길이 시인이 되는 길이었다.
이후 7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또한 캐나다 중앙일보의 김효 회장이 글을 써 달라며 나에게 논설위원이라는 직함을 주어 12여 년간 캐나다 데일리신문에 썼던 글을 모아 ‘캐나다를 알자’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컬럼집이 조국에서 널리 읽혀져 많은 동포들이 이 책을 읽고 이곳으로 이민을 와서 나에게 전화를 해주셨다. 이 영향일까 모국의 통일문화진흥회의라는 단체에서 나에게 서부 캐나다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해서 몇 번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수락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