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중국 남부 작은 마을인 양숴현의 한 영어 학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을 때 일이다.
교육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나에게 중국 데스크톱 앱인 QQ를 다운받으라고 했고, 나는 페이스북과 이메일로 연락하자고 제의했다(당시 중국에선 페이스북이 허용됐다).
그렇게 몇몇 학생들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지만 대부분 ‘zwpzjg59826@126.com’과 같이 길고 의미 없는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었기 때문에 주소를 기억하기 어려웠다.
수년이 흘러 베이징에서 프리랜서 기자와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도 중국 고객들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카피라이트 업무 관련 소통은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앱인 위챗을 통해 이뤄졌다.
완성한 작업을 고객에게 보내는 것도, 보수를 받는 것도 모두 스마트폰에 설치된 위챗을 이용했다.
이 모든 과정은 속도와 기동성 면에서 내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절대 우위 ‘위챗’
서양에선 업무를 할 때 이메일을 많이 사용한다.
미국에선 90.9%, 영국에선 86%의 인터넷 사용자가 이메일을 애용한다.
이메일이 인터넷 뱅킹, 정보 검색, 영상 시청을 모두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온라인 활동에 자리에 오를 정도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딜로이트가 진행한 ‘2018년 중국 모바일 고객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들의 이메일 사용률은 세계 평균에 비해 22%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인들이 이메일 대신 선택한 것은 위챗이다. 전체 스마트폰 이용자의 79.1%가 해당 앱을 사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선호도는 직장까지도 이어진다.
위챗 운영사인 텐센트 산하 연구기관 ‘펭귄 인텔리젼트’의 ‘2017년 위챗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2만 명 중 약 88%가 일상 업무에서 위챗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화와 문자 그리고 팩스를 사용한다고 답한 사람은 59.5%로 2위를 차지했고 이메일이 22.6%로 3위에 올랐다.
PC방 문화
중국 인구 10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위챗은 누구나 사용하는 ‘슈퍼 앱’이다.
중국인이 위챗과 같은 플랫폼을 선호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9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 테크놀로지 회사 텐센트는 미국 온라인 업체 AOL이 소유하고 있던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 ICQ를 바탕으로 QQ를 개발했다.
당시 중국인 100명 당 컴퓨터 수는 1.2대에에 불과했다. 반면 같은 시기 미국은 국민 2 명 당 한대의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전역에 인터넷 카페 붐이 일었다.
이런 카페들이 특히 젊은 층의 인기를 끌었던 주된 원인은 QQ다.
QQ는 이메일과는 달리 개인 아바타 생성이나 인스턴트 메시지 전송 등 인터랙티브한 기능을 제공했고, 게임이나 음악,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 등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운전면허증과 같은 존재
’미래 중국의 슈퍼 트렌드 (2008)’의 작가 제임스 유안과 제이슨 인치는 중국인에게 QQ나 MSN 계정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유안과 인치는 저서에서 “그건 서양인들에게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을 상상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2012년 기준 QQ 실제 이용자는 7억 9800만 명으로 중국 전체 인구의 절반을 웃돌았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텐센트가 2011년 선보인 위챗의 인기는 QQ의 인기를 뛰어넘었다. 현재 위챗은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통 도구다.
중국 디지털 혁신 분야 컨설턴트인 매튜 브래넌은 많은 국가에선 온라인 활동을 하려면 이메일 주소가 필요하지만, 중국에선 모바일 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설명했다.
위챗이나 알리페이처럼 여러 기능을 갖추고 있는 앱에 접속하면 예약, 결제, 메세지 송신 등 모든 온라인 활동을 앱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스턴트 메시징
청콩경영대학원 경제학과 종 링 조교수는 위챗이 중국의 업무 문화에 잘 맞는 소통 도구라고 말한다. 위챗에선 이메일에서 사용되는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허물없는 소통은 즉각적인 답변을 가능하게 한다”며 “중국 문화에선 신속한 답변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종 조교수는 또 중국에선 업무와 개인 생활 간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면서, 공식적인 근무 시간 이후에도 업무 관련 소통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소소한 답을 듣기 위해 다음날 근무시간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바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또한 업무를 위해 여러 명이 함께 소통해야 할 경우, 이메일보다는 위챗을 사용하는 게 훨씬 빠르다.
하지만 여기엔 사람들이 매시간 업무 관련 소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다는 단점이 있다.
‘빠른 답변 요망’
페이스북이나 왓츠앱, 위챗 등 어떤 소통 플랫폼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소통 방식 또한 조금씩 달라진다.
브래넌은 “(인스턴트) 메세징 플랫폼에선 상대방이 더 빠른 답변을 기대한다”면서 “주말에 문자를 받았어도 답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미권 국가에선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예절이 남아있다.
이메일 첫인사에 “친애하는-”을 붙인다거나 마지막에 “-배상”을 붙이는 것 등은 모두 편지 예절의 흔적이다.
하지만 여러 아시아 국가에선 빠르고 격식을 덜 갖춰도 되는 메시징 앱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임 컨설턴트 알랜 케이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컴퓨터 시대를 건너뛰고 바로 모바일 연결로 넘어갔다”며 “이 때문에 페이스북·위챗·라인·카카오톡·잘로 등과 같은 소셜 플랫폼 흡수율이 매우 높았다”고 설명했다.
아시아 전역에 지사를 둔 컨설팅 회사 프로펫에서 일하는 케이시와 팀원들은 이메일보다는 이런 채팅 앱들이 아시아에 훨씬 더 잘 맞는다고 평가한다.
업무용 채팅 앱
중국 대형 기업이나 업무 효율성에 최적화된 앱을 필요로 하는 이를 위한 비지니스용 채팅 앱도 있다.
알리바바가 개발한 ‘딩톡’이나 바이트댄스사의 ‘라크’ 그리고 업무용 위챗인 ‘위챗 워크’는 문서 공유나 온라인 편집 기능뿐 아니라 급여 지급 기능과 더 높은 수준의 프라이버시 등을 제공한다.
딩톡에선 상대방이 메세지를 읽었는지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확인요망’ 메세지를 보낼 수 있다.
과거의 잔재
내가 가르쳤던 학생인 양슈오 왕은 내게 이메일 주소를 남겼던 학생 중 하나였다. 우린 이메일로 얼마간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내 연락이 끊겼다.
몇 해 전 왕과 위챗에서 연락이 닿았고 그는 현재 중국 광둥 지역의 조명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 줬던 이메일을 아직도 쓰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어떤 이메일 주소를 나에게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만들어둔 이메일 주소가 여러 개였던 것이다.
왕은 이제 거의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아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르겠다며 “위챗을 가장 많이 쓴다”고 했다.
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인에게 위챗은 일상의 한 부분인 반면 이메일은 과거의 잔재일 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