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공 목수 공장 보조 일 너무 힘들어 SAIT서 용접 공부

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②

캘거리공항 활주로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착륙할 수가 없었다. 에드먼톤 공항으로 우회했고 거기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다시 캘거리공항으로 와 이민 도장을 받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택시를 잡아 이민국 가까운 호텔에 데려달라고 했다. 중국인 택시기사는 너무 딱해 보였는 지 3불인 택시비를 안주어도 된다고 했고 “Goo Luck!”이라고 격려해주었다.

이튿날 이민국에 가서 간단한 수속을 했다. 인자하게 생긴 패터슨 씨가  메모 한장을 주며 택시를 타고 하숙집에 가서 짐풀고 이틀 뒤 다시 오라고 했다. 그 쪽지엔 택시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릿지랜드 인근 하숙집은 폴란드 출신 60대 할머니가 운영하고 있었다. 아들이 목사였다. 한달 하숙비는 70불. 식사도 주고 점심 샌드위치도 챙겨주었다. 독일에서 세금 환급받은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고도 200불이 남아있었다.

이틀 뒤 이민국으로 갔다. 패터슨 씨는 다음날 아침 하숙집 인근 메모리얼 드라이브에 서 있으면 누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했다. 요즘  새벽에 홈디포서 일용근로자를 뽑아가듯 시멘트 믹스기를 단 트럭이 와 나를 픽업했다. 

일자리도 구해주고 장비도 사준 고마운 이민국

첫 작업은 신축하우스에 굴뚝을 벽돌로 쌓아 만드는 것이었다. 추운 날씨에 시멘트믹스를 담은 버킷을 사닥다리로 지붕 위에 올라가 전달하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지붕도 눈으로 미끄러워 위험했다. 힘이 달려 체력적으로 견딜 수 없었다.

일주일만에 그만 둔다고 했다. 당시 최저임금이 1불75센트 였는데 주급으로 71불을 받았다. 한달 하숙비는 번 셈이었다.

다음주 월요일 다시 이민국을 찾아가 벽돌 쌓는 일이 힘들고 위험해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친절한 패터슨 씨는 이민 서류에 내 전공이 목수로 적혀있는 것을 보고는 다음날 아침 하숙집 앞에서 목수일 하는 사람이 데리러 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목수는 장비가 필요하다며 100불을 주며 어디 상점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했다. 자켓과 작업용 구두, 망치 그것을 허리에 찰 하네스 등을 샀다.

이튿날 아침 하숙집앞에서 반톤트럭이 나타나 나를 픽업해주었다. 단층 방갈로 신축 현장이었다. 엄청나게 긴 지붕 목재 프레임을 둘이서 들고 올라가 못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이었다. 턱으로도밀어야 했고 큰 못을 박아야 했다.

 캐나다 목수 파트너는 대못을 꽝꽝 박아나가는데 나는 망치로 손가락을 칠까 바 두려워 제대로 일처리를 할 수가 없었다. 점심때 그냥 보따리를 샀다. 캐나다 목수가 놀라 “어디 가느냐?” 가 물어 그냥 “집으로 간다”고 했다. 집도 없는 처지이니 하숙집으로  뺀소니친 것이다..

이민국에는 미안해서 다시 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보자고 생각해서 공장지대를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Canada Iron이었다. 사무실이 있도 작업장도 따로 있었다. 작업장의 책임자는 다리를 조금 절었다. 독일 출신으로 전쟁중에 부상을 입은 참전용사였다. 

독일 출신 메니저 만나 용접회사에 취업

Job Opening이 있느냐고 물어니 지원서류를 건네주었다. 언어란에 프라이머리 언어로 한국어, 세컨 언어로 독일어 그리고 영어는 잘 못한다고적었다. 그 양반이 내가 독일어를 한다고 하니 조금 반가와 하는 눈치였다. 독일에서 광부로 3년 일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네덜란드 출신 메니저에게 데려다 주어 독일어로 인터뷰했다. 메니저도 독일어가 유창했다. 메니저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유리창을 통해 공장 내부를 들여다 보며 드릴로 구멍을 뚫는 일은 할 수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큰회사라서 그런 지 그런 일도 수습과정이 필요하다며 먼저 general helper로 일하도록했다. 공장은 여러가지 철골이나 철제품을 만들었고 여기엔 용접작업이 많이 동반되었다. 말단 허드레 일을 하는 내 시급은 2불5센트였다. 그런데 일반 용접공은 시급이 3불50전이었고 도면을 보고 구체적인 철구조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간당 5불이었다. 그런 기술자는 주 정부가 인정하는 용접 관련 라이선스가 있어야 했다.

 캘거리 처음와서 이민국의 두터운 이민자 명부를 살펴 보았는데 김 이 박 정 최같은 한국인 성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캘러리 이민국을 통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그해 67년 말부터 한인 이민자들이 한 두명씩 오기 시작했다.

68년 초기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밴프에서. 뒷줄에 안병준씨, 앞줄 왼쪽에 캘거리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정경훈씨, 필자, 병아리감별사로 왔던 오필호씨 부인과 미혼인 전영자씨

이듬해 새내기인 안병준, 이재호씨와 함께 SAIT 야간 용접공 양성 과정 코스에 등록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6개월 코스였다.

안병준씨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동요를 작곡한 안병원씨의 동생이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영문번역 일을 해서 영어를 잘했다. 결혼할 여자 친구가 드럼헬라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었고 여친의 도움으로 이민을 왔다. 술도 잘하고 해서 나하고는 무척 친했는데 먼저 타계했다. 이재호씨도 공병학교 통역장교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했다.

학력도 좋고 영어도 능통한 그 친구들은 용접공으로 일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공부해서 용접자격증을 땄다. SAIT에 다시 등록해 설계도면을 읽고 제품을 만드는 코스를 거쳐 주정부 공인 용접사가 되었다.

당시 알버타 북부 포트맥머리에서 유전개발이 본격회되고 있었다. 열처리를 위해 파이프안에 알루미늄  코일을 감은 특수 파이프를 새로 제작해야 했다. 미국 휴스톤에서 기술자가 와서 가르쳐주었는데 내가 빨리 익혀 그일을 맡게되었다. 시급도 높고 오버타임 등으로 수입을 많이 올릴 수있었다. 

3개월 휴가 얻어 한국가서 신부 만나 결혼

68년엔 3개월 휴가를 얻어 한국에 나갔다. 인병준이 간호사 부인의 친구를 소개한다고 했는데 만나도 못했고  친척이 소개한 젊은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한국으로 나가기 전 이민국에 들러 페터슨씨에게 옛날에 꾸어준 1백불을 갚겠다고 말했다. 정부 돈을 떼먹으면 재입국이 안될까 싶어 걱정했기 때문이다. 패터슨씨는 껄껄 웃으며 그 돈으로 술이나 한잔 해라고 했다. 1백불은 정부가 빌려준 돈이 아니고 benefit 이었다. 그만큼 캐나다는 좋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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