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⑥
태양정육점 건물을 처분하고 얼마 뒤 Hasty market 그로서리 스토어 체인 하나를 인수했다. 지금으로 치면 Safeway나 Sobey 같은 그로서리 체인같은 것인데 물론 규모는 그보다 작었다. 사우스 웨스트 Chinook Center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A-마트 건너편 상가에 있던 8천 SF의 큰 매장이었다. 은행대출도 12만불을 내었다.
아내는 덩지가 너무 커 버거울 것같다며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막상 해보니 운영이 장난이 아니었다. 24시간 물을 열어야 하는 대형 그로서리라 인력관리가 특히 힘들었다. 종업원들 가운데 질이 좋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하루 종일 근무할 수고 없었고 아내도 애들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못했다.
아내 말이 맞았다. 플랜차이즈 본사에 체인을 도로 인수해달라고 요청했다. 30만불이 들어갔는데 25만불에 인수하도록 해주었다. 변호사들 입회하에 원금 25만불은 1년후에 정산하고 그동안에 매월 이자를 받기로 했다.
임대해준 체인 그러서리 창에 ‘Closed’ 사인
이자는 8개월동안 잘 들어왔다. 어느날 Macleod Trail 가다 임대해준 그로서리를 보았는데 창문이 모두 흰종이로 덮여있었다. 놀라서 가까이 가보니 ‘Closed’라는 사인들이 붙여 있었다. 변호사에게 연락해보니 본사가 부도가 나 모든 체인점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그로서리 재고는 처분할 권리가 있는데 Street value로 1백불짜라를 1,2달러 밖에 받을 수 없었다. 그동안 힘들게 모았던 돈을 다 날려버려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이 때가 85년도이다.
그래도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젊으니까 다시 도전해야 했다. 그로서리을 오래하고 한인실업회 회장으로 봉사한 덕분에 캐나다 도매상들을 알고 있었다. Gonald Food Supply LTM 사장을 찾아갔다. 그 회사는 지금 Dairy Queen 같은 햄버그 체인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 회사가 햅버그 체인 직영을 그만두고 개인들에게 가게들을 불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장에게 내 형편을 이야기 하고 체인점 하나를 내가 운영할 수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빈털털이가 되어 인수금도 없었다. 계약금 없이 열심히 해서 매달 얼마씩 갚고 5년 안에 인수금액 8만불을 다 갚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그리고는 처음 시작할 때 필요한 햄버그 재료들도 많이 공급해주었다. 사업 실패의 와중에 신용과 인덕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 지 모른다.
도매상 지인에게 신용 얻어 햄버거 체인점 얻어
Glenmore 동쪽 Ogden에 있는 초기 형태의 드라이브 스루 햄버그집이었다. 햄버그 가게 이름은 Bob’s. 열심히 했다. 종업원이 13명이나 되었다. 때마침 인근에 비료공장이 건설되어 모텔에 상주하는 트럭커들이 많아 장사가 잘 되었다. 덕분에 빚을 갚으며 가정을 지킬 수 있었고 애들 뒷바라지도 계속할 수 있었다.
91년 Bob’s 햄버거 가게를 처분했,다. 비료공장 건설이 끝나 매상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백수가 되었다. 무엇을 할 까 생각해야 했다.
어느날 Glenmore 동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동차 몰(mall)을 지나가게 되었다. 크라이슬러사에 들어가 메니저를 만나고 차를 팔고 싶다고 말했다. “차를 판 경험이 있냐”고 물어 “없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차를 파는 것도 결국 사람을 다루는 일이 아니겠냐며 지니고 있던 과거 내 명함들을 보여주었다. 그로서리 대표, 캘거리 한인회장, 실업인회장 등의 명함이었다. 그가 OK해 바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매니저가 이틀 뒤 사표를 써고 나가버리고 새로운 매니저가 들어오더니 그도 곧 나가버렸다. 좁은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던 동료가 새 매니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상사로 모실 수 없으면 떠나라고 했다. 미련 없이 떠났다.
GM 매장 세일즈맨으로 변신 82세까지 근무
그리고 다시 들어간 곳이 캐디락도 파는 GM 매장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이해 무슨 일이던 해야 했지만 자동차 세일즈는 내 적성에 맞았다. 곧 Shift Manager가 되어 독립적으로 차를 팔 수 있는 융통성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캐나다인 동료들은 오전 8시 반 출근하면 3시반에 바로 퇴근해버렸지만 나는 한 두 시간 더 일했다.
판매후 애프터 서비스를 철저히 했고 그 덕분에 다른 가족이나 친지들과 연결되어 차를 더 많이 팔 수 있었다.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투자 이민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같은 초기 이미자들과는 달리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 캘거리에 도착 후 호텔에서 전화를 걸어 나한테 연락을 주었다. 그러면 내가 픽업해서 매장으로 함께 가 바로 새 차를 뽑게 했다.
‘이달의 판매왕’, ‘올해의 판매왕’ 등 많은 상을 탔다. 나보다 더 많이 실적을 낸 세일즈맨이 거의 없었다. 91년 시작해서 2008년까지 18년간 일하고 은퇴했다.
3년 동안 놀고 있는데 옛 사장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다시 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현장으로 나가 Made in Korea 기아 차를 팔았다. 82세가 되는 2019년까지 근무했다
늙인이가 일한다고 “아니! 아직도 일하세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집에서 뭐하란 말이냐?”고 되묻었다.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