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④
외로운 초기 이민자에게 결혼도 큰 문제였다. 지금은 한인 이세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예사이다. 큰 며누리는 캐나다인, 첫째 사위는 중국인, 둘째 사위는 인도계인 경우도 있다. 여기서 자란 한인 이세들은 ‘인종차별을 타부시하는 교육을 철저히 배우기 때문에 타 인종과의 결혼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나 자신 며누리는 아들이 한국 나가 일할 때 만난 한국인이지만 사위는 캐나다인, 미국인이다.
60년대 한인 이민자들의 정서는 전혀 달랐다. 한국에서도 연애결혼 보다는 중매결혼이 대세였고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기였다. 20년전 LA에서 어느 한인이 딸이 결혼하겠다며 흑인을 데리고 오자 자살해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나도 파독 광부 시절 한 독일 아가씨를 알게 되었지만 문화 언어 음식 사고방식이 다른 외국 여자와의 결혼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캘거리 첫 신랑 이윤교 ‘장가 리”로 불려
캘거리 최초의 한인 결혼식은 서독 광부 후진인 이윤교가 테이프를 끊었디. 그는 서독에서 사귄 간호사 출신을 불러 여기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 같은 노총각은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이은교를 ‘미스터 리’라고 부르지 않고 ‘장가 리’라고 불렀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치루어졌는데 신부 입장할 때 김창영박사가 신부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나는 그 떼 나이가 30이 꽉 찬 노총각이었다. 단짝이었던 안병원씨의 부인이 중매에 나서 서울에 사는 후배 간호사를 소개했다. 서울 모토로라 파견 간호사라는데 사진을 보니 인물도 좋았다.
다니던 Canada Iron에 두 달 휴가를 내고 장가 가러 68년 서울로 갔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화장품 선물도 마련했다. 도착 후 고향 집에 들르니 고종 사촌 형수가 좋은 아가씨가 있으니 그 간호사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나이 많은 처자 가운데 숫처녀가 별로 없다는 것도 강조했다.
소개한 아가씨는 48년생인 20살의 대학생 정혜자었다. 무려 11살이나 차이가 나서 조금 당황하였지만 고종사촌 형수는 마구 밀어부쳤다. 좋은 집안이었다. 장모될 분은 숙명여고 교사를 하시다 은퇴하셨고 부친은 국가공무원으로 퇴임하신 분이었다. 오빠는 천호동서 사우나가 있는 낀 큰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사고방식이 개방적이었다. 형수가 얼마나 나에 대해 좋게 말을 했는 지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우리 집안에선 31세 노총각이 장가간다 하니 그저 감지덕지 하는 분위기였다.
아내는 3남3녀중 막내였다. 어린 아가씨와 한달간 데이트를 하다 1968년 6월 15일 서울 동원예식장에서 혼례식을 치뤘다. 한국일보 주필이였던 류광렬씨가 주레를 섰다.
병무청의 트집으로 출국 수속 안돼 식은 땀
안병준씨 부인이 소개한 모토로라 간호사는 만나보지도 못했다. 결혼을 하고 캐나다로 돌아와야 하는데 출국 수속이 첩첩산중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방부의 도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젊은이가 병역의무를 마치지 않으면 외국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군에서 현역으로 병역의무를 다 하고 서독으로 갔지만 지난 4년 동안 받았어야 할 예비군 훈련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앙청 외무부에 가서 관련 출입국 기록 등 여러가지 기록철을 들고 국방부 인력관리과에 갔다. 당담 중령은 병무청에 가서 독일 가기 전 예비군 훈련받은 기록을 가져오라고 했다. 병무청에 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담당자는 자꾸 고개를 갸우뜽거렸다.
누가 귀뜸 해주어 양담배 한보르를 사서 ‘담배 한대 피우시라’고 하니 그제서야 못이기는 척 하고 서류를 떼주었다.
그래도 국방부 인력관리과 중령은 이 필계 저 핑계를 들며 서류를 해줄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디. 회사 휴가가 다 되어가니 속이 탔다. 당시 공화당 정책위원장 비서를 하던 고총사촌형을 찾아 고충을 하소연했다. 사촌 형은 당시 최영희 국방장관실에 연락해주겠다고 말했다. 알고보니 그 분이 또 경주 최씨로 나의 먼 인척이었다.
국방장관 비서실에 가니 육군소령이 내가 가져간 많은 서류들을 들쳐보더니 ‘문제가 없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력관리실로 전화해 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안된다고 하던 국방부 인력관리실 그 중령은 떨뜨러운 표정으로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내 외로움에 처가집 식구들 대부분 초청
캐나다로 다시 돌아온 지 3개월만에 수속을 마치고 아내는 캘거리로 이민왔다. 나는 브릿지랜드에 단정한 콘도를 준비해두었다. 안병준씨 부부가 바로 이웃에 살았다. 아내는 안병준씨 어린 아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아내는 그러나 곧 ‘심심한 천국’ 캘거리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같았다.
그래서 장인 장모님을 캘거리로 이민 오실 수 있도록 초청하고 관련 수속에 나섰다. 이후 처가집 처남 3명과 처형도 차례로 이민을 왔다.
72년 캘거리로 온 장인은 당시 63,4세 였는데 역시 할일이 없어 무료해하셨다. 영어가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어니 더 그랬다. 한국에선 은퇴를 해도 365일 찻집으로 출근해서 친구분들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보내신 분이었다.
어느날 장인은 7번가에 소재한 어느 공장의 경비직을 얻었다면 멋진 모자를 쓰고 오셨다.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의 야간 근무였다. 영어를 30단어 밖에 할 수 없어 내가 가서 야간 순찰중 시간을 찍는 기기에 키를 넣고 순찰기록을 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드려야 했다.
문제는 출퇴근 때 라이드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밤 12시 출근을 도우고 집에 오면 1시가 되고 또 아침 8시에 함께 회사에 가려하니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했다.
다행히 막내 처남이 캘거리로 이민와 장인 장모과 가까이 생활했다. 장인은 그런데로 작 적응하셔서 캘거리 한인 노희회장으로 봉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