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청원으로 건너편 세븐일레븐 개업 막아 전화위복

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⑤

73년 용접일을 그만 두었다. 그동안 생활도 하고 돈도 조금 모았고  두플렉스 반쪽 집을 사두고 세를 놓다가 몇년 후 팔았는데 1만2천불의 수익을 얻었다. 욱체적인 일도 그냥 그냥 먹고만 살아가기는 조금 억울했다.

그동안 모은 종자돈으로 무역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에 가니까 마침 수출 붐이 일어 조그만 무역업을 하는 오퍼상들이 많이 있었다. 캐나다에서 왔다고 하니까 서로 먼저 샘플을 보여주겠다며 초청했다.. 캐나다로 수입해 팔 수있는 여러가지 아이템을 찾다가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멋진 라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외 접는 낚시대 등 소픔 액세사리를 수입했다.

시누크 몰에 일본인이 하는 안도 보석상이 있었다. 부탄 라이터를 보여주니 관심이 있었다. 얼마냐고 물어 3달러라고 했다. 통관비등을 해서 수입가가 1달러 였으니까 3배 장사였다. 나중에 보니 그 상점을 내 물건을 29.99달러에 팔고 있었다.

시누크 몰에 있는 시어즈에 접는 낙씨대도 납품했다. 1불에 수입해 3.5불에 팔았다. 그러나 무역업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자본이 달려 대규모 수입을 할 수가 없었다. 생할은 할 수있었으나 출장으로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아내가 싫어했다.

74년 말에 사우스 이스트 Fair Mount Drive에 있는 조그마한 코너 스토어를 인수했다.  이후 컨비니언스라고도 하는 코너 스토어는 한인 이민자들의 대표적인 비지니스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업종이었다.

당시 한인 이민자들 가운데 세 분이  전국 체인인 Max Convenience 메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소유주가 아니라 경영을 맡고 수익을 일부를 가져가는 형식이었다.

새로 옮긴 컨비니언스 너무 잘 돼 큰 집과 차도 사다

새로 인수한 코너 스토어는 장사가 잘 되지않았던 곳이었다.  깨끗이 단장하고 인벤토리를 늘렸더니 조금씩 매상이 늘기 시작했다. 10개월 정도 되었을 때 세븐 일레븐에서 일하던 캐나다인이 독립하고 싶다며 가게를 팔아라고 요청했다.

2만불 정도 들었는데 스탁(재고)을 포함해서 5만불 이상 받았다. 이제 새로 더 번듯한 컨비니언스 스토어를 열고 싶었다.

사우스 이스트 지역 Forest Lawn 17가에 새 상가를 하나 얻어 5-6만불 들여 신장 개업했다. 막상 장사를 시작해보니 가게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게 출입이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해야 하는데 거꾸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하도록 구조가 되어있었다.

하루 매상이 겨우 3백불 정도로 기대 이하였다. 하도 답답해서 애드먼톤에 있는 한인식품도매점과 연결해 한국식품을 가져다가 가게 절반을 채워봤다. 그런데 17Ave 남쪽으로 몇 블락 떨어진 곳에서한국식품을 취급하던 이영선씨가 찾아왔다. 좁은 한인 사회에서 한국식품으로 경쟁을 하는 것은 너무 부담이 되니 양보해주면 어떻겠냐고 부탁했다. 꼬시래기 제살 뜯기로 한국인끼기 하는 경쟁은 나도 찬성 할 수없었다. 이영선씨가 내 가게 한국식품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흔퀘히 양보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얼마후 건너편에 새 상가건물이 들어서고 거기에 세븐일레븐 체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덜렁 내려 앉았다. 캘거리시에 청원을 냈다. 불과 지근 거리에 대형 체인인 세븐 일레븐이 문을 열면 영세한 내 가게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으므로 제발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시 청문회에 가서 열심히 설명했다. 고맙게도 시에서 나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주고 건너편에 세븐일레븐의 허가를 내주지 않는 조치를 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이후 건너편 새 상가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상가 구성상 편의점이 하나 있어야 하니 내 가게를 그쪽으로 옮기면 이전 비용도 보상해주고 리스도 좋은 조건에 해주겠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이었다. 곧 건너편으로 옮겨 셋업을 시작했다.

문을 정식으로 열기 전에도 사람들이 들어와 담배와 음료수등을 찾아 하루 500불 매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정식 오픈을 하고 두달 후부터는 하루 매상이 1천불씩 올라왔다. 기존 가게는 출입이 출근하는 사람에게 편리했는데 새 가게는출입로도 넉넉하고 퇴근 길 집으로 가는 손님에게 편리하도록 되어있었다.

장사가 잘 되어 재미를 보고 돈도 모았다. 그러다 80년도에 세븐 일레븐에서 구매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시청에 항의를 해서 지점을 못낸 세븐일레븐은 내 가게를 팔아달라고 했다. 15만불 인수금에 인벤토리 6만불까지 해서 21만불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그해 보우강변을 낀 캘거리 사우스 디어런지역에신축된 큰 집으로 옮길 수있었다. 차도 캐디락 제일 큰 차를 구입해 Canadian Dream에 접근해갔다. 그러데 나중 비즈니스가 망했을 때 이 고급 대형차를 몰고 나가면 친구들이 “허세 부리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Fair Mount Dr.에서 첫 코너 스토어를 열었던 즈음 서울시스터즈라는 한국인 순회 밴드그룹이 있었다. 캘거리를 비롯 토론토 몬트리올까지 순회 공연을 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룹이 해체되게 되었다.

베이스기타와 백파이프를 잘 하고 춤도 잘 추는 릴리 리라는 여자벰버가 있었다, 키고 크고 늘씬한 여성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밴드가 해체되어 영주권을 따고 싶은데 가게에서 일할 수있도록 부탁했다. 릴리는 여러 해 우리 가게를 도아 주었고 영주권을 땄다. 주말에는 메니저처럼 가게를 운영해주었다.

그러면 일요일 밤에 그날 가게에 들어온 돈을 노란 봉투에 넣어 집으로 가져오고 식사도 함께 했다. Forest Lawn 가게가 잘 될 때 한번에 2천5백물 정도의 금액을 가져온 것같다. 그 봉투는 장롱 서랍에 넣고 은행에 입금하고 했는데 이사를 갈 때 짐을 정리하다 보니 입금을 안한 봉투가 5-6개 남아 현금이 1만5천 달러나 되었다. 와이프는 횡재한 그 돈을 자기가 쓴다며 ‘노 타치’를 선언했다.

릴리 리는 이후 프렌치 커네디언과 동거 결혼을 했는데 5년전 우방암으로 캐거리서 타계헸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겨 한 일 년 푹 쉬었다. 큰 RV카를 렌트해 애들 셋을 데리고 한달간 캐나다 대서샹을 여행하기도 했고 한국도 다녀왔다. 그리고 이것 저것 알아보다. 다운타운 상가건물을 하나 인수했다. 현재 엘보 리버 카지노 인근 15Th Ave에 있는 태양 정육점 건물이다.

당시 70년된 누후상가였지만 2층에 2베드룸 주거시설이 두 개나 되고 아래층 가게 뒷편에도 1배드 스위트가 있었다.. 주거시설은 세를 놓고 상가는 다시 꾸며 조그마한 코너스토어를 만들었다. 이 가게도 곧 다름 사람에게 세를 놓았다.

새로 구입한 노후 상가에 불이나 가슴 철렁 내려 앉고

어느 날 밤12시에 경찰에서 전화 았다. 건물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덜렁 내려앉았다. 세입자 하면이 브라운관식 TV를 켜놓고 나가버려 불이 나 카펫까지 옮겨 붙여 타버린 것이었다.

화재보험에 들었지만 너후 건물이라 10만불밖에 보상이 되지않았다. 그런데 수리비는 전선을 지하로 넣는 등 새로운 규정으로 9만불이  더 들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며 서울 강남에 상가를 갖는 것이 한국사람들의 로망이라지만 건물 세를 받아 먹고사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건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렌트비를 미루는 것도 예사였다. 한 젊은 독신 세입자는 렌트비가 3개월이나 밀려 독촉하니까 사냥총을 득고 나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경찰이 출동되고 그 친구는 수갑에 채여 끌려갔지만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결국 상가 건물을 처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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