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⑦
78년 경부터 캘거리에 그로서리(Convenience)를 하는 한인 이민자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한번씩 함께 모여 저녁을 함께 하고 관련 정보를 나누었다.
나도 그로서리을 하고 있던 터라 그 모임에 나갔다. 80년대 들어 그로서리 하는 분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 그로서리 협회 친목모임이 만들어지고 오익상, 김광인씨 등이 회장으로 이끌어왔다. 나에게도 캘거리 초기 이민자이고 발이 넓으니까 회장을 한번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나는 흔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그로서리 하는 분들의 친목모임을 너머 비지니스를 하는 캘거리 한인들을 모두 아우러는 한국인실업인 협회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정부에 nonprofit orgarnization으로 등록도 하고 도매상들을 만나 가격 협상에도 나서자는 것이었다.
협회 이름을 Calgary Korean Business men’s Association in South Alberta로 만들고 임원 조직도 갖추었다. 82년도의 일이다. 부회장인 정좌시, 섭외부장인 양의환씨와 함께 도매상들을 방문하고 한인실업인협회의 존재를 알리고 협조를 부탁했다.
협회의 buying power를 보여주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모이는 게 좋았다. 새로운 회원들을 찾고 초대했다. 도매상들에게 한인실업인협회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Mcleod Trail과 36th Ave에 위치한 Holliday Inn의 연회실 2칸을 빌려 한인실업인협회 모임을 개최하기로 기획했다.
밴드도 부르고 만찬도 준비했다. 칵테일도 제공되었다. 협회가 새로 시작되어 회비가 적립되어 있을 리 없었다. 회장인 내가 비용을 부담했다. 당시 한인 비지니스 종사자들은 80명 정도로 생각된다. 초창기 그로서리 하는 분들 외에 한식당 샌드위치 스모크샵 구두수선소 세탁소등 관련 한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로서리 도매상 세일즈 매니저들도 초청했다. 한인 가족들을 포함해 모두 2백명이 참가하는 큰 행사가 되었고 한인 호텔 연회의 선례가 되었다.
실업인 협회 멤버쉽 카드 (사진)도 만들었다. 도매상에 그 멤버쉽 카드를 보여주면 디스카운트와 함께 배달료도 깍아주도록 만들었다. 가령 5백불을 구매하면 5% 디스카운트 해주고 배달이 필요할 겨우 업차지를 절반으로 적용하는 식이었다.
실업인협회는 이렇게 리베이트 받은 돈을 일부 적립했다. 후임 회장들의 노고와 헌신으로 협회는 자체 웨어하우스를확보하고 공동구매사업도 나섰다. 협회는 나중에 10만불이란 적지 않은 돈을 한인회관 건립을 위해 희사하게 되어 나자신도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멤버쉽 카드를 만들 때 협회 로고 제작에도 신경을 썼다. 미대를 나온 장충현씨와 함께 태극기와 캐나다기를 넣고 색상이 좋은 디자인을 함께 고안했다.
이듬해 캘거리 한인회장을 맡게 되었다. 캘거리 이민의 대부인 김창영박사의 협조를 부탁하고 자문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부회장에 양의환, 기획부장 차용랑,총무부장 양화백, 섭외부장 송광옥, 체육부장 이준석, 문화교육부장이봉우, 홍보부장 노연대, 재정부장 최종환, 사회봉사부장 박종훈 등으로 임원진들도 꾸며졌다.
한인회장을 맡고 있을 동안 소련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83년 9월 1일에 뉴욕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가 비행 중 사할인 인근 영공에서 소련 수호이 15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탑승자 268명 전원이 숨진 비극이다.
나는 한국에 갔다 캐나다로 돌아왔는데 그 시간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던 비행기가 격추된 것이다.
캘거리 한인들의 본노도 극에 달해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긴급히 회의를 하고 4일 캘거리 시청 앞에서 대규모 소련 만행 규탄대회를 열였다. 내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김창영박사도 영어 스피치를 하셨다. 한인들뿐만 아니라 체코 베트남 사람 등 모두 1천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플래카드와 팻말들을 들고 10가까지 행진을 했다. 이유식씨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구호를 선창했다. ‘살인마 소련을 규탄한다’, ‘무찌르자 오랑캐’등의 구호가 울렸다. 신문 방송도 이 규탄대회를 취재해주었다.
이해 말 새로운 한인록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 전에는 철필과 등사기로 만든 한인록이 있었는데 번듯한 인쇄물을 만들기로 계획했다. 한인들이 제법 늘어났고 한인 비지니스도 성장하고 있었다. 한인록에 비지니스 유료 광고도 넣었다. 보험 교회 회계사 식당 식품정 미용실 침술원 여행사 태권도 자동차수리 등 20여개의 광고가 실렸다. 업소록에 등재된 캘거리 한인들도 거의 400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연말에 실업인협회에서 했던 것처럼 업그레이드된 ‘송년 한인의 밤’을 개최했다. 노우스 이스트 말보로 호텔 연회실을 빌리고 독창 연주 고전무용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협찬을 받아 경품 추첨까지 했다. 2백50명이 참석 칵테일 만찬을 즐겼다. 이후 한인의 밤 모임은 호텔연회실에서 하는 게 전통처럼 되었다.
한인회장으로 봉사하던 중에 캘거리시가 주최하는 International Food Fairl에 참가했다. 유럽 각국 아시아 등 30여개국이 참가했고 여기서 2등상 큰 트로피를 타 매우 기뻤다. 한인 여성분들이 적극 참여해서 불고기 잡채 파전 돼지두르치기 김치 등을 현지인들에게 선보이며 캘거리 한인들의 문화와 파워를 보여준 것이다.
당시 캐거리 한인들 모두 애국심과 동포애가 많아 단합이 잘 되었다. 한인회관 건립에도 애착심이 많아 전임 이원재 회장 재임 때 한인회관 건립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기금모금을 위해 김한태 건립위원장이 복권발행까지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후 나는 한글학교 등 여러가지 건립 위원회에 참가했는데 교회 건립위원회에도 여러 번 내 이름을 올려지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