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공부로 3,4시간 밖에 못 자는 비참한 유학, 그래도 도움 손길들이

“내 영어를 못알아 들어?” -김희정의 유학•이민 25시 ①

1989년 알버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하기 위해 캐나다에 첫발을 들였다. 원래 계획은 미국 유학이었어나 캐나다에 사는 언니의 제안으로 알버타로 진로를 바꾸었다. 

22시간의 비행을 경험하면서 애드먼톤 도착한 것은 모기가 공항에서도 극성을 부리는 5월이었다. 

토플점수가 좋아 공부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을 들어가면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내 말을 외국인들이 잘 이해했는데 캐나다에 오니 내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명색이 영문과 출신인데 기가 막혔다.

내 영어는 책에서나 나올법한 단어를 쓰고 문법에 맞게 말하더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는 수준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여러 나라에서 와서 나름대로의 엑센트로 말하니 알아듣는 것이 어려웠다. 

또한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일상적인 단어들도 너무 당혹시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도 두려워서 밖에 나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선교사업 할 때 한집에 함께 살았던 트림불 자매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녀는 한국말을 잘해서 내가 어려워 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고 리포트를 쓸 때도 도와주었다. 

자연스러운 영어를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트림블이 내게 조언도 했다. 그 방법은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가 영화 매니아 였다. 

한 비디오를 20번 이상 보며 스피드를 그대로 쫓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여 영어를 따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과목을 해야 했으므로 시간에 쫓겼다. 

 돈도 필요하기 시작해서 일과 학교 공부를 병행하자니 잠잘 시간도 없었다. 때로 하루 3-4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면서 살아가는 나는 정말 비참했다. 공부를 하고 있고 미래에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처음 캐나다에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서 부터 시작을 해야하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한다. 그래도 나는 정말 운이 좋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어려울 때는 언제나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의 고집으로 인해 그 손을 잡지못하고 도움을 구하지 못한 때도 많지만, 그래도 항상 주변에는 문이 있었고 원하면 그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회에서는 성신의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늘 나를 도와 주시고 내가 가고자 하고 내게 길을 인도 하신다는 것을 안다.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1992년초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를 열심히 기다려 주었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여행사에서 유학업무를 좀 했다. 이어 대학 시간강사를 시작하고 학원 영어 강사로 진출했다. 노량진의 영어 전문 학원 IMI ( 일미일 어학원)의 program director로 그동안 개발해 multimedia를 이용한 영어교수법을 마무리했다. 

일미일 학원 회장님과 함께 프로그램화하여 학원에서 시범적으로 실행했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TV를 보면 다시보기 바 기능을 추가되는 등 혁신적인 방법으로 언어를 공부할 수있는 도구 로 발전하였다. 1992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을 지금은 쉽게 인터넷에서 찿을 수있게 되었다. 

박원장님과의 만남은 내게 많은 경험과 교육자로서의 자세 그리고 성공을 함께 가져오게 한 것같았다. 그러나 아이 둘을 낳고 과중한 업무와 프로그램 개발, 학원 운영 등을 병행하니 몸이 지쳐갔다. 둘째 낳고 얼마되지 않아 친정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어느날 수업을 마치고 공원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캐나다에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힘들어서 학교를 마치자마자 떠나온 캐나다. 언니가 형제 초청을 해 주었음에도 가지 않았던 곳인데.. 

남편과 상의했는데, 의외로 가보자고 했다, 부모님도 계시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그로 써는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민을 신청했다. 남편이 엔지니어로 오래 근무하였기 때문에  쉽게 독립이민으로 영주권을 딸 수 있었다. 2000년 6월 네살 한살 두아들을 데리고 언니네가 있는 캘거리로 왔다. 

캐나다 이민을 따게 되었다. 어린 두아들을 데리고 고국을 떠나오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것을 뒤로 하고 와야만했다. 가족과 우리둘의 안정적인 삶 그리고 경제적인 것도 함께. 

C&K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