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⑧
2004년 어느날 차환씨가 나를 찾아왔다. 라이온즈 클럽 NE EyeOpener 회원이라는 그분은 캘거리에 한인들의 라이온즈 쿨럽을 세우면 어떻겠냐는 본부의 권유를 듣고 있었다. 그 전 해 이태섭씨가 한인으로선 처음으로 국제 라이온즈 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라이온즈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에선 여유가 있는 기업인들이 하는 봉사 자선 단체이고 돈이 없으면 가입할 수 없다는 이야기 정도만 알았다.
차환씨는 캐나다에서는 다르고 여기선 봉사정신만 있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라이온즈 역사와 정신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149개국에 150만명의 멤버가 있고 커뮤니티에 여러가지로 도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사회에서 활동한 적이 없어 한인 라이온즈 클럽을 세우는 데 앞장설 수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다 내 처남의 소개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는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차환씨는 백인들이 하는 라이온즈 클럽 charte Night에 한번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이후 올림픽 파크 건너편 세라톤 호펠에서 열린 라이온즈 클럽 차타 나이트에 참석하게 되었다. 만찬과 칵테일 그리고 밴드도 있는 모임이었다. 모임 중간 국제 라이온즈 클럽 회장을 역임한 전 캘거리 대법원 판사 Brian Stevenson가 축사를 하면서 돌연 “여기 캘거리 한인 라이온즈 클럽 초대 회장이 될 분인 Paul Choi가 와 계시다”며 날 보고 일어나 인사하라고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캘거리 한인 라이온즈 클럽 설립 위원장이 되어버렸다.
한인회장인 황명먄씨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라이온즈 클럽을 만들어야겠으니 사람 좀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35명의 회원이 학보되어 글렌모아 인에서 발기인 대회(사진)가 열렸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모임에서 부회장에 신일섭씨, 총무이사에 재키 박, 재무이사에 서병희씨 등 임원진들이 지명되었다. 두 여성 분은 많이 배운 분이고 굉장히 똑똑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 한인 라이온스 클럽 창립 모임이 옥던 글렌모아 인에서 열렸다. 국제 라이온즈 클럽 회장인 이태섭씨가 특별히 참석해주었다. 지구 클럽 회장들, 스폰서 클럽 그리고 한인단체장 등 300명이 참가하는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일에 회원들이 열일 제치고 열심히 봉사했다. 단합이 너무 잘 되었다. 라이온즈에선 모든 모임 비용은 회원들이 부담해야 한다. 1달러가 들어오면 회원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봉사를 하기 위해선 기금이 필요했다. 기금 모금을 위한 여러가지 계획이 진행되었다. 10km 걷기 운동, 한인골프대회, 빙고게임 봉사, 풋불 스타디움 햅버그 판매 봉사 , 스탬피드 행사 참가 등을 통해 몇백불, 몇천불의 기금을 모았다. 개인적으로 사업하는 분들에게서도 기부금을 받았다. 기부금은 세금에서 공제된다.
내가 물러난 이후 한인 라이온스 클럽은 카지노 봉사를 통해서도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첫해 배당금이 14만불이 나왔다. 이후 조금 줄었어도 격년마다 6만불, 8만불의 수입이 들어왔다.
한인 라이온즈 클럽은 그런 기금을 모아 한인화관 건립 위원회에 24만불정도를 기부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매년 1-2만불의 회관 운영비도 보조했다.
한인장학재단에 매년 5천불을 기부하는 것을 비롯 한인문학회, 합창단, 체육회, 노인회 등 한인회 산하단체에 얼마씩 도아주었다. 6.25 때 마다 캐나다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경노잔치(사진)를 열었고 홈리스를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참가했다. 또 한인 양로원 건립에도 적극 참여하고있다.
나는 한인실업인회장, 한인회장을 거친 뒤에도 여러 한인단체들에 끊임없이 관여하게 되었다. 한글학교 이사, 한인회 이사 및 이사장, 교회 건립 위원회 위원, 한국 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등.
평통자문위원은 한인회로부터 추천되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4대 대통령을 만났다. 약방에 감초처럼 새마을본부 위원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내가 자청한 것이 아닌데도 자꾸 그렇게 되어 ‘감투’를 밝힌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아내는 집에서 일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다며 집안 일에 더 힘을 쏟아다면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란 말도 했다. 어떻든 와이프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감사장도 많이 받았다. 2004년 10월에 밴쿠버 둘째 처남댁 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잔 아빠, 이것 참 놀라 자빠지겠네. 한국신문에 국민훈장 석류장을 탔다고 크게 났어요!”
총영사가 캘거리로 방문해 한국관에서 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상식을 했다. “훈장만 주고 금일봉은 안주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영사는 이 훈장을 받으면 사형선고를 받아도 반납하면 사형이 면제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들이 이 상을 받고 난 뒤 블로그에 아버지에 관해서 글을 올렸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