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어를 못알아 들어?” -김희정의 유학•이민 25시 ②
한살 네살 두 아들과 함께 오랜 비행으로 지친 나는 앞으로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채 캘거리 공항에 내 언니렸다. 형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크가 있는커뮤니티에 작은 집을사고 정착했다, 그런데 이민온 지 3개월만에 언니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다. 컴퓨터사이언스 전공인 형부가 텍사스에 잡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가족은 혼자가 되었다. 캘거리서 맨땅에 해딩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백인들이 대부분인 사우스웨스트 지역에 자리를 잡아 한인 커뮤니티와는 동떨어진 채 살았다. 한달에 한 번 전철에서 어쩌다 한국말을 들을 정도였다.
여러가지 면에서 캐나다는 선진국이었지만 핸드폰은 무슨 무전기 만큼 컸다. 한국선 얇은 핸드폰을 두 개나 들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너무 비씨고 커서 불편했다.
가지고 온 돈을 곶감 빼먹듯이 살았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하루는 교회 감독님과 십일조 접견을 하는데 우리에게 수입이 없으니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집에와서 곰곰히생각해보니 십일조에 관한 축복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그 축복을 받기위하여 수입이 없지만 매달 100불씩 십일조를 냈다. 정말 어려운일이었지만 신앙을 행사하기로 했다.
화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로 온 남편을 좋은 직장을 쉽게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자동차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남편은 여러가지 기술이 좋은 사람이지만 도무지 직장을 구할 수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해밀톤으로 가야하지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캘거리는 석유산업 중심이라 남편의 경력이 인정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것이다. 그래도 십일조를 내면서 신앙으로 마음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이곳 사정과 현실을 직하면서 남편은 ESL을 듣고 나는 Bow Valley College 에서 Work Experience Class를 듣으며 취업 준비를 했다.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했다. 신앙이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고 캐나다의 삶에 열심히 몰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Bow Valley College에서 직업을 얻을 수있었다. 이곳에서 International Student Advisor로 일하고 TOEFL을 가르치며 많은 한국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캐나다에 오면 영어를 가르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또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고생이 심했다. 매일 데이 케어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Water’라는 말을 못하여 물을 못얻어먹어 내가 데리러가면 물을 사달라고 했고 그 1살짜리가 물 한병을 다 마셔버렸다.
겨울에 얼굴에는 늘 동상에 걸려있었다.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엄마 때문에 아침부터 일찍일어나야 했다.
나 자신 또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아이들을 더 이상 데이케어에 보낼수가 없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기로 했다.
남편은 SAIT에서Piping Design 을 공부하고 틈틈히 알바를 뛰고 있어서 아이를 돌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직 너무 어린아이들, 한국에선 시부모님 이 다 돌봐주셔서 걱정없이 일을 했왔던 나는 캘거리서 혼자 모든 일을 다해야하는 상황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잠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이라는 것을 태어나 처음 하게 되었다. 너무 늦게 철이 든 것같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다시 Canadian Conversation College 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개발하던 Multimedia 를 통한 영어 교실을 운영하게 되었고 많은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일하던 학원 원장님의 아들이 이곳에 오게되었다. 그리고 아는분들의 자녀들이 캐나다에 공부 하러오게 되면서 학원을 그만두고 집에서 Canada Youth Education 이라는 작은 학원을 개설하여 한국학생들에게 대학을 갈수있도록 공부도 가르치고 홈스테이도 하면서 다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