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어를 못알아 들어?” -김희정의 유학•이민 25시 ③
어려운 이민생활은 비단 어른들에게 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유난히 백인들만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아이들은 많은 색다른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이 일종의 인종차별 인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도시락에 한국 음식만 싸가면그날은 아이들이 영낙없이 왕따를 당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영어로 지어주지 않았는데 이름을 가지고도 놀리곤했다. 말도 못하던 아이들이 느꼈을 마음의 상처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지금은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어린아이들은 한국하면 한국전쟁만을 알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늘 캐나다식 음식을 도시락으로 싸야했다,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큰 아이는 또래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한국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정말로 어린나이에 와서 자신도 한국 경험이 별로 없었다.
정체성의 혼란이 와서 자기가 한국인인지 캐나다 사람인지 알아가고 방황 하는 시간이 아이들에게 찾아오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에라도 이민을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차가운 이곳 아이들의 세계를 알수는 없지만 문화의 벽은 두터웠다.
이것은 이곳에서 느꼈던 이방인으로서의 가슴아픔 중의 하나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한국인이 없었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에서 아이들과 지냈으면 아이들이 더 잘 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끝내고 큰아들이 3학년이 되면서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남편도 정식 직장을 얻고 내가 하는 사업도 커져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많은 한국 아이들이 우리집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관리형 유학을 시작되었다.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인성교육을 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기존에 다른 집으로 유학을 왔던 아이들도 우리집으로 오겠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2명의 캐나다 선생님을 고용했다. 이후 조기 유학생들의 학교공부와 함께 입학문제 비자문제를 도와야 했다.
못하지만 학교공부와 학사 문제 비자문제들을 돕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런데로 캐나다에서 잘 적응해 나갓다. 문제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을 떠나온 엄마들이었다. 그 전만 해도 엄마들이 영어코스만 등록해도아이들이 엄마의 학생비자로 학교를 그냥 다닐 수있었는데 그 혜택이 없어지면서 엄마들도 정규학교를 들어가거나 워킹비자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머니들을 학교로 보내기위한 TOEFL 어머니교실이었다. 많은 엄마들을 학교로 보내고 아이들이 무료수업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시작했다.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내 삶은 더울 바빠졌다.
돌보고있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느라 늘 바빳던 나는 정작 우리 아들이들에게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른아이들을 돌보는것도 중요하고 나의 명예와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가족이 아닌가. 그게 이민 온 목적이었는데.
교육 사업을 잘나가던 사업을 전부 접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접을수 있었을까 신기하다. 잘 운영했으면 지금쯤 학교 하나는 만들수 있었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어쨋든 사업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남편이 생계를 도맡고 나는 가정주부가 되어 우리 가족만 한집에 오롯하게 지내는 것은 너무 좋았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고요한 그리고 행복한 시간들이 나의 활동적인 성격에 맞지않았던 것일까. 우울증 비슷한갱년기가 시작이 되었고 다시 일을하고 싶은 욕망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도 캘거리 한인여성회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