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한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오후 10시 15분 노환으로 서울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90세.
정 추기경은 1931년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다. 친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고인은 열 살 때부터 명동성당의 복사(服事ㆍ미사 등 천주교 예식을 보조하는 사람)를 했다.
어린 나이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일 새벽 미사에 참석하려면 오전 4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다. 3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고인은 생전에 “다들 자는 시간이라 무서웠다. 수표동에서 을지로를 거쳐 명동성당까지 혼자 다녔다. 겨울에는 길이 안 보일 만큼 캄캄했다. 전차가 다니는 새벽 5시 이전이었다. 그래서 전찻길 한복판으로 다녔다”며 “그래도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나는 깨어있다. 사람들이 다들 잘 때, 나는 큰일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신을 극복하는 훈련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정 추기경은 명동성당 옆에 있는 계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앙고를 나와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고인은 국민방위군에 소집돼 장교로 복무했다. 대학생 때만 해도 그의 꿈은 ‘발명가’였다. 그런데 전쟁의 참상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 부대가 얼어붙은 남한강을 걸어서 건널 때였다. 제 바로 뒤에서 갑자기 얼음이 깨졌다. 부대원들이 아우성치며 물에 빠져 죽었다. 바로 코앞에서 그걸 봤다. 그게 저일 수도 있었다. 또 바로 곁에서 지뢰를 밟고 폭발로 죽는 전우도 봤다. 매일매일이 제 마지막 날이었다. 그때 절감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구나.”
정 추기경은 전쟁 기간 내내 기도했다. “내 삶의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게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였다고 했다. 전쟁 후의 삶은 그에게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덤으로 사는 인생에 가장 보람된 일은 뭔가.” 그건 남을 위해 사는 삶이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가서 30세 때 사제가 됐다.
정 추기경의 세례명은 ‘니콜라오’다. 가톨릭 성인 니콜라오는 서기 300년께 작은 도시의 주교로 있었다. 당시 세 처녀를 구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몰락한 집안의 아버지가 돈을 받고 세 딸을 매춘부로 팔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니콜라오 성인은 몰래 금이 든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니콜라오는 ‘선물을 주는 이’로 통한다. 네덜란드 신교도들은 그를 ‘신터클라스(Sinter Klass)’라 불렀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산타 클로스(Santa Claus)’가 됐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정 추기경의 모토는 ‘옴니버스 옴니아(Omnibus Omnia)’였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뜻이다. 모토에 담긴 의미를 고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타는 버스(Bus)에 옴니버스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승용차는 처음에는 개인용이었다. 부자들만 탔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탈 수 있게끔 만든 게 버스다. 그처럼 모두와 함께 나누는 게 ‘옴니버스 옴니아’다.”
정 추기경은 모토처럼 그런 삶을 지향했다. “남을 위해 살려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진짜 사랑이 뭔가. 그건 내가 상대방과 같아지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람은 하나만 만들지 않으셨다. 여럿을 만드셨다. 그러니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상대방, 그 속에 하느님이 계신 거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들 속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걸 위해 “내가 먼저 이해받길 바라지 말고, 남을 먼저 이해하자”고 말하곤 했다. 정 추기경은 자신의 사후에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는 서약서를 이미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고인은 39세 되던 해인 1970년에 국내 최연소 주교가 됐다. 이탈리아 로마의 우르바노대 대학원에서 교회법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천주교 청주교구 교구장과 주교회의 의장을 거쳤다. 2006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한국인으로선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고인은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하기 전에도, 은퇴한 후에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 성경을 펴고, 읽고, 묵상했다. 그리고 깊은 묵상의 열매를 기록하고 책으로 냈다. 새벽 미사를 한 뒤 아침 식사를 하는 오전 8시까지 항상 책을 썼다. “어릴 때 새벽 미사를 다녔던 힘이 지금도 작용한다”고 말하곤 했다. 지금껏 쓴 책만 50권이 넘는다.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을 부탁하면 종종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나만을 위해 살지 마시고,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 더 크게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고자 노력해 주십시오. 그리고 실력을 키우십시오. 그래야 여러분 각자의 인생이 보람 있고 풍부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을 위해 살지 말고, 많은 사람의 선익을 위해 살아주십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 추기경의 장례 일정을 논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