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문화에 큰 영향 끼친 해외군인 신부들

60년 전 모레타니아 II호가 핼리팩스의 21번 부두에 정박했을 때 승객 943명의 삶은 큰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캐나다 육군 해군 공군들이 해외에서 복무하는 동안 결혼한 부인과 자녀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 군인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캐나다로 왔지만 1946년 2월 9일 마우레타니아호가 도착하면서 약 4만8천 명의 신부와 2만2천 명의 아이들이 캐나다로 오게되는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이 영국인이었던 이들 전쟁신부들은 캐나다 문화와 사회 변화에 영향력을 미쳤다.

캘거리 대학 커뮤니케이션문화학과 학장인 캐슬린 셔프는 “영국에서 온 중 4만 5천명의 신부가 캐나다에 들어오면서 요리법,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 정치, 재정, 남편에 대한 생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전쟁 신부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면 오늘날의 캐나다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정 내에서 여성들이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생활 방식에 커다란 문화적 파장과 굳건함이 있었다.

물론 전쟁 신부들은 자신들이 문화적 변화를 함께 가져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새로운 환경에서 배우고 적응하는데 바빴다.

“우리는 영국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다른 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라고 태버의 헤이즐 웨스트는 말한다.
그녀는 1946년 4월 24일 남부 앨버타에 있는 레이몬드에 사는 남편 러셀과 합류하기 위해 아키타니아호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모든 것이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stocking은 hose로, bathing costume은 swimming suit로 불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초원위의 농촌 마을은 극장과 오페라 관람을 좋아했던 21세의 런던 젊은 여성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끔찍한 문화 충돌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캐나다에서의 삶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6년 12월 앨버타에 온 도린 케이미스는 알버타 전쟁 신부 협회 회장이다. 많은 전쟁신부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야 했다고 회상한다.

알버타에 온 많은 다른 전쟁신부처럼 그녀도 전기나 수도가 없는 집에 살아야 했다.

발렌타인 데이에 결혼 60주년을 맞은 에드나 맥도날드는 캐나다에 온 것은 “특히 대도시 출신이라면 큰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 팻은 전쟁 후 공군에 근무해 20년 동안 21개의 다른 집으로 옮겨살아야 했다.
전쟁 신부들에 대한 혼합 미디어 전시회를 만든 캘거리 예술가 비벌리 토시는 “혹독한 기후에 석탄 나무 난로와 이상한 화장실을 사용해야했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없어 불평도 늘어놓을 수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전쟁신부들의 결혼 사진을 바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방통행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녀의 전시회는 2007년 Pier 21과 국립 전쟁 박물관을 포함한 전국에 걸쳐 열렸다.

전쟁 신부들은 대부분 결과적으로 캐나다에 온 것을 기뻐한다.

“저는 저희 가족이 캐나다에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라고 현재 할머니이자 증조할머니인 웨스트는 말한다. “저는 그들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봅니다. 그들은 모두 이 나라에서 놀라운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에스더 엘리어트는 밸런타인데이에 Kensington Legion에서 매달 오찬을 위해 모인 25명의 전쟁 신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딸의 세 번째 생일인 1946년 7월 21번 부두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녀가 즉시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저는 탁 트인 이 나라가 정말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영국에서 살았을 때보다 여기서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았어요.”
영국 가족을 떠나 아이들을 챙겨서, 거의 모르는 남자와 미래를 향해 가고, 삶을 꾸려나가려면 배짱이 있는 여자가 아니면 안되었다.

피에르 베르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목할 만한 전쟁 신부들의 이민을 “최근 역사상 위대하고 예고되지 않은 대중 운동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이 나라가 그들에게 더 좋습니다,”라고 덧붙였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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