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비치는 세상의 종말을 위해 항상 계획을 세워왔다. 대규모 지하 벙커를 구축하고 그날이 오면대피처를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수염이 덥수룩한 이 발명가는 온타리오주 오렌지빌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 호닝스 밀스에 있는 자택에서 현대판 노아가 되기 위해 인생의 절반을 준비하는데 보냈다.
그는 1980년대에 42대의 스쿨버스를 땅에 묻고 세계에서 가장 큰 민간 낙진 대피소인 ‘방주 2호’를 기획했다. 그런 다음 그는 친구, 가족, 동료 생존자들을 자신의 대의를 위해 모집했고, 핵이 강타한 후 사회 재가동을 위한 계획을 모았다. 심지어 공통의 언어를 통해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왔다.
그러나 브루스 비치의 삶은 8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를 겪은 후 세상보다 먼저 끝이 났다. 비치는 지난 5월 10일, 병든 아내와 5명의 다 큰 아이들, 거대한 벙커, 새로운 세상을 위한 계획 중 일부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제 그의 가족, 친구, 추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다가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누군가가 불확실한 최후의 날까지 비치의 임무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방주 2호는 캐나다 노아와 함께 묻힐 것인가?
그는 언젠가 터질 수있는 핵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벙커를 설치하려고 했지만, 계획은 항상 진행중이었다.
이 대피소는 물이 새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 비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벙커의 기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고,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브루스의 방주에 대한 비전은 핵전쟁이 있을 때 사람들이 갈 수 있는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었다. 핵전쟁이후 그곳은 주로 어린이들이 대피하는 고아원이 될 수도 있었다.
비치가 정확히 어떻게 벙커 건설을 위한 비용을 마련했는 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비치는 큰 뜻을 품고 자신의 돈을 써가며 건설을 시작했고 해가 지날수록 소소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을 받기도 했고 여러가지 물물교환 행사도 했다.
현재까지 벙커 건설에 투입된 비용은 알려진 바가 없다. 벙커가 온전히 가동되지는 않았지만, 이 장소는 비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허브가 되었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벙커에 나타나 일을 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비치는 매년 여름마다 수백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예비 모임을 열곤 했다.
그는 벙커가 지방정부의 규정에 따라 지어지지 않아 사용하기에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 속에서 지역 정치인과 소방관들과도 자주 싸웠다.
화이트 멜란톤 시장은 “지역 당국자의 입장은 부동산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은 벙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브루스가 벙커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2000년대 초 소방서장이 현장 전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많은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 소방서장은 소방서장은 출입문을 용접으로 문을 폐쇄하기도했다.
이러한 “평화적 대치”는 결국 2015년 비치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화이트가 이곳을 방문할 때까지 수년간 지속되었다. 정교한 벙커에 대한 그의 모든 작업과 핵전쟁에서 살아남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비치의 야망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벙크에서 사용될 보편적인 언어도 꾸었다.
비치는 ‘천사의 혀’로 불리는 이 언어의 청사진 이상을 남겼다. 그것은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발음형 영어였다. 그는 세상의 종말 이후 다양한 그룹들이 그 언어로 소통하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