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30명 벽촌 그로서리서 연매출 120만불

“시골서 찿은 성공, 더 행복해진 김용진 이옥희 부부 ②

그 지인의 소개로 에드먼톤에서 동북쪽으로 1시간여 떨어진 인구 1,000여명의 자그마한 타운인 Smoky Lake에 있는 한인 경영 모텔에서 방을 하나 장기임차하여 정착지가 결정될 때까지 거처로 사용했다.

▶ 비지니스 찾아 하루 수백km 다녀

적은 자금으로 비지니스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던 에드먼톤의 지인과 함께 거의 매일 하루에 수백 Km를 질주하며 알버타를 동서남북으로 헤짚고 다녔다.

Listing되어 있는 주유소, 그로서리, 컨비니언스, 모텔 등 비지니스 식견도 넖힐 겸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가능한 비지니스도 찾고자 그렇게 했다.

결국은 에드먼톤에서 동북쪽으로 2시간여 떨어진 인구 130여명의 자그마한 마을, Ashmont에 있는 General Store를 매입하였다. 시골 마을이라 독점을 하고 있었고 그로서리, 우체국, 코인론드리, 리커등 온갖 비지니스를 취급하였다.

2층에는 2개의 Suite이 있어 편리와 주거가 동시에 해결되었다. 가까운 타운은 인구 6천여명의 St Paul로 약 30Km 거리에 있었다. 주변에 두 곳의 원주민 리저브가 있으며 다수의 호수가 있다.

둘이서 힘을 합쳐 펼친 자랑스런 한국인의 기개는 지칠 줄을 몰랐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우체국 일을 시작으로 저녁까지 일년 364일 (크리스마스만 휴무)을 일을 했다.

우리 부부와 캐내디언 헬퍼(동네 할머니)가 함께하는 가게 일은 힘든 것도 모른 채 행복과 기쁨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작은 공간이지만 최대한 다양하게 상품을 주문하여 항상 진열장이 꽉차게 준비하였다.

담배와 일반 그로서리 공급업체는 맥도날드라는 회사였는데 주 1회 물건을 주문했다. 아내는 성격이 나와는 정반대로 워낙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타입이라 공급사로부터 매주 날라오는 물건주문용 캐덜로그가 도착하면 샅샅이 공부(?)를 하여 보물들을 찾아냈다.

특히 그 주의 특별할인 품목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에게 맡겨놓으면 잘 팔릴 수 있는 것만 반복해서 주문하기 때문에 다양성이 떨어져 그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박스단위로 주문을 해야하므로 부담은 있었지만 아내의 보물찾기는 가게를 하는 내내 계속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마을 주변에 있는 Farmer들이 하나 둘 우리 가게를 찾기 시작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100 이상씩 사는 대형고객이었다.

가격은 큰 타운에 있는 대형 그로서리와 같거나 약간 낮게 책정해서 고객들이 비싸다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했다. 다만 세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형 그로서리의 세일품목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혼심을 다하니 외곽 농부 원주민도 단골로

처음에는 담배를 에드먼톤에 있는 코스코나 TGP등에서 사날랐다. 한 번은 코스코에서 담배를 먼저 사고 다른 그로서리를 일부 사기 위해서 TGP를 갔는 데 나와보니 차 유리창이 깨지고 담배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보험으로 일부 보상은 받았지만 그 일 이후에는 담배도 맥도날드를 통하여 공급을 받았다.

리커 역시 가격을 타운에 있는 대형 주류판매점과 유사하게 책정을 했다. 이는 매주 날라오는 할인품목을 주로 주문하여 창고에 비축해 놓고 할인기간이 끝나면 정상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고객도 불만이 없고 비니지스에도 도움이 되었다.

코인론드리는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기계 안팍은 물론 바닥, 테이블등을 항상 깨끗하게 해 놓아 세탁기가 없는 주민들과 캠핑장 캐빈 손님들이 즐겨 찾아와 세탁도 하면서 담소도 나누고 커피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6개월여의 긴 겨울이 끝난 뒤 첫번째 연휴인 5월말 Victoria Day를 기점으로 정신없이 바빴고 동네 주민은 물론 여름철 캐빈 손님들, 주변 Farmer들, 일부 원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우리 가게를 찾아 단골이 되어가면서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시골 동네에서 유일한 가게이다 보니 별난 일도 자주 벌어졌다. 하루는 새벽에 가게 문을 막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 창문을 열고 보니 단골 손님 한 분이 급하니 꼭 문을 좀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대충 챙겨입고 내려가니 새벽에 일을 나가야 하는 데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서로 농담도 하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기쁜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었다.

늦은 밤에도 역시 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종종 듣는다. 주로 야간에 병원에 갈 수가 없어 해열제, 진통제등 응급약을 찾곤 했다.

여름철에는 스쿱핑 아이스크림이 인기상품중 하나였다. 동네 주민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멀리서도 오곤 했다. 주로 나이 많으신 부부들이 옛 추억을 찾아 즐겨 찾아왔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손님들을 가족처럼 대하였고 아내는 따뜻한 마음으로 손님들과 포옹을 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동네 장례식이 있으면 반드시 참석했으며 행사에 빠지지 않고 도네이션을 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게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난 평일 오후 세시경 아내가 카운터에 있었고 나는 2층에 올라가 쉬면서 보안카메라 모니터를 보고 있는 데 한 손님과 무엇을 주고받는 듯 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도가 들었던 것이다.

한 명은 가게 입구에서 망을 보고, 또 한 명은 차 안에서 대기한 가운데, 가게안에 들어온 사람은 복면을 하고 총기 개머리판을 보여주며 아내에게 현금을 요구했는 데 처음에는 아내가 장난인 줄 알고 주저했다가 나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캐시함에 있는 돈을 모두 주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이럴 때를 대비해 현금은 적정 금액만 캐시함에 두었으므로 피해액수도 크질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내려갔었더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가게를 선택한 이유중 하나가 2층에 우리 살림집 말고도 별도로 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캘거리나 에드몬톤에 거주하면서 한인가게들에 물건을 대주는 한국분들이 늦게 도착하는 날에는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드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타주에서 알버타주로 이주를 한 분들에게 정착할 때까지 또는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비록 인구 130여명의 벽촌이었지만 호수와 원주민 리저브가 주변에 있고 주민의 다수가 육체 노동자라는 비교적 좋은 비지니스 환경을 십분 활용하면서, 40대 후반의 동갑내기 부부는 완벽한 역할 분담, 열정과 봉사정신으로 비지니스를 운영하여 연매출 120여만불까지 끌어올렸다. 그런중에도 텃밭을 열심히 가꾸어 상추등 왠만한 야채는 길러 먹으며 기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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