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몰던 펀잡 문학청년 장관 거쳐 시장에

1964년 인도 펀잡주 농촌 시크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마르지트 소히는 17살인 1981년 형의 후원을 받아 에드먼턴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의 삶은 극적인 요소가 많다.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ESL 수업을 듣고 에드먼턴 보니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첫 직업은 택시 기사였다. 그러면서 지역 펀자비 문학회에 가입했고 펀자비 연극 그룹의 배우이자 극작가가 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 인도 서북부 펀잡을 중심으로 시크교도들이 분리독입을 요구하는 칼리스탄 운동은 매우 활발해졌고, 캐나다의 많은 인도 시크교도 디아스포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 운동은 곧 펀잡 반란으로 발전하여 할리스타니 분리주의자들과 인도와의 지속적인 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캐나다의 시크교 공동체도 양극화되었다.

1984년 인도 육군이 하르만다르 사히브 단지와 아카알 타흐트를 공격하고 그해 말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면서 시크교도들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소히와 그의 가족은 인도 정부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에 반대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시크교도들처럼 온건하고 반원리주의자로 남아있었다. 소히는 자신을 “세속적인 개인”이라고 표현하며 터번을 착용하지 않았고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1988년 4월 소히는 펀자비의 극작가이자 개혁가인 구르샤란 싱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돌아갔다.그는 곧 인도의 가장 가난한 주 중 하나인 비하르에서 토지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그해 11월 소히는 현지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비하르의 한 마을로 갔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법정 판결을 통해 18개월 감방살이를 했다. 인도의 감옥생활은 죽음과 다름없었다.

국제앰네스티의 회원들을 포함한 인도와 캐나다의 언론인들과 활동가들은 곧 소히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보보수당 의원과 인권운동가 데이비드 킬고어를 통해 소히의 가족들은 캐나다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압박한 뒤 극적으로 풀려났다.

에드먼턴으로 돌아온 후, 소히는 택시 운전사로 복귀했고, 에드먼턴 교통국의 버스 운전사가 되었다. 노조에 가입하여 2000년에는 장애인 버스 운전자들이 공정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옹호했다.

이를 계기로 소히는 지역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2004년 에드먼턴 시의회 선거에서 4위로 첫 고배를 마신뒤 2007년 재도전에 나서 6선거구 시의원이 되었다. 시의회에서 소히는 에드먼턴 경찰 위원회 위원, 앨버타 도시 자치 단체 부회장, 범죄 예방을 위한 지역사회 해결 위원회인 사페드먼턴의 의회 후원자로 맹렬히 활동했다. 지역사회 리더십을 인정받아 여러 개의 상을 받았다

2015년 1월, 연방 자유당은 소히를 에드먼턴 밀 우즈의 새로 창당한 경선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기 위해 접근했다. 그리고 6월 밀우즈에서 트뤼도 자유당 당수와 함께 대규모 집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고 79표 차이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2015년 트뤼도 내각에서 사회기반시설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2018년에 천연자원 장관으로 옮겼다.

2019년 대선에서 소히는 보수당 팀 우팔에게 패배했으나 이번에 에드먼톤 시장으로 다시 등장했다.

소히는 1993년 아내 사르비에와 결혼했다.둘 사이에는 프리랜서 NBA 칼럼니스트인 딸 시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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