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금메달 안겨준 ‘캐나다판 안현수’

캐나다 대표팀에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며 미국으로 귀화한 봅슬레이 선수 카일리 험프리스(37)가 여자 봅슬레이 역대 올림픽 개인 최다 금메달(3개) 기록을 썼다. 험프리스는 14일 중국 베이징 옌칭 국립 슬라이딩 센터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 모노봅 경기에서 1~4차 시기 합계 4분19초27로 정상에 올랐다.

험프리스는 은메달을 따낸 엘라나 메이어스 테일러(미국·4분20초81)보다 1.54초 빨랐다. 썰매 종목에서 매우 큰 격차다. 1인승 봅슬레이를 뜻하는 모노봅은 이번 올림픽에 처음으로 채택돼 험프리스는 초대 챔피언의 영광도 안았다. 그는 또 봅슬레이에서 두 개 이상 국가 대표팀 소속으로 금메달을 딴 첫 선수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나이를 먹으며 인생이란 예측 불가능하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험프리스는 원래 캐나다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 캘거리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성이 시먼드슨이었는데, 2007년 남편(2014년 이혼)을 따라 성을 바꿨고 2019년 재혼해서도 예전 이름을 그대로 쓴다. 어렸을 때 알파인 스키 선수였지만 두 번의 사고로 양쪽 다리가 차례로 부러져 16세 때 그만둔 뒤 썰매로 전향했다. 2010년 밴쿠버와 2014년 소치대회에서 2인승 봅슬레이 2연패를 이뤄 캐나다 최고 체육인에게 주어지는 ‘루 마시 상’을 받았다.

그가 이상 징후를 보인 건 2018 평창올림픽이었다. 당시 동메달을 따냈던 험프리스는 가족에게 “연맹 회장과 감독 등에게 정신적·언어적 괴롭힘을 당해 우울증에 걸렸다”고 털어놨다. 험프리스에 따르면 그가 평창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뒤 어머니와 함께 짐을 찾으러 캐나다 올림픽 공원에 갔을 때, 그의 짐이 공원 밖 도로에 버려져 있는 걸 보고 모녀가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험프리스와 캐나다 봅슬레이연맹과의 긴 싸움이 이어졌다. 험프리스가 감독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고소했지만, 그의 동료들은 캐나다 대표팀의 문화를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 캐나다 봅슬레이연맹이 외부에 의뢰해 벌인 조사에선 ‘험프리스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분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작년 7월 캐나다의 스포츠분쟁조정센터는 “연맹이 의뢰한 조사가 철저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며 “독립적인 조사가 벌어져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험프리스는 캐나다 봅슬레이연맹에 방출을 요구해 다툼 끝에 승인을 얻어낸 뒤 미국올림픽위원회와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작년 말 미국 시민권을 따냈다. 한때 라이벌 팀이었던 미국 유니폼을 입고 네 번째 올림픽 메달을 따낸 험프리스는 “이번 메달은 내 감정을 더 자극한다”고 했다. 그는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야 했고, 싸워야 했다”며 “내 앞길을 막으려 했던 많은 사람과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스폰서를 대부분 잃은 험프리스는 변호사 선임을 위해 돈을 쓰느라 남편과 함께 신용카드 빚을 내 장비와 코치 비용을 지불했고, 5000달러(약 600만원)짜리 중고차를 타고 다녔다.

험프리스는 “이 메달은 지난 4년 동안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저 일부에 불과하고 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오는 18일 한때 적이었다가 이제 동료가 된 메이어스 테일러와 함께 2인승 봅슬레이에서 대회 2관왕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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