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광부가 가짜 목수로 미지의 ‘붐’ 도시 캘거리 이민

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①

나는 1937년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송철리 대성동 511번지에서 아버지 최정근, 어머니 배창희  슬하에 신라 6남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경주 최씨로 신라 대학자 최치원의 후손이다.  어린 시절은 일제시대였고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부모님들은 쌀은 물론 놋그릇과 숟가락 끼지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는 등 어려운 삶을 영위하셔야 했다. 어린 나도 송진과 솔방울을 채취하고 기생충인 이(lice)를 모아 학교에 가져가는 일도 했다.

8살인 국민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빈곤 속에서 생활이 어려웠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좌우 정치 대립이 격심해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이어 1950년 6.25 사변이 터졌다. 13살 때였다. 1.4후퇴땐 가족 모두 걸어서 충북 진천으로  피난을 갔다. 한국 근대사의 험한 격동기에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5.16 혁명 1년 전에 군에서 제대했다. 군에선 주로 인사 관련 업무를 맡았다. 제대한 후에는 작은 외숙과 함께 서울 평화 시장에서 와이셔츠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그러다 외숙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

새로운 진로를 생각하던 차에 서독으로 파견될 광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외향적이고 새로운 것을 마다않는 도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건 것 같다.  서독이란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었다.

100대 1 경쟁 거친 고학력의 파독광부

19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전국에서 4만6천 명이 지원했다. 경쟁율이 100대 1에 육박할 만큼 치열했다. 나는 양양철산 총무과장을 하셨던 부친 친구분을 찾아뵙고 ‘광부증명서’를 만들어달라고 성가시게 졸라대었다. 말도 안되는 청탁이었는데 그 증명서로 파독 광부 1진에 끼어들 수 있었다. 

사실 서독 광부로 가는 이들 중엔 광부 현장 경험이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대졸자였다. 보사부장관 아들, 장관 보좌관, 교수 아들, 육군대위 장교 출신도 있었고 퍼스트레이디인 육영수여사 육촌 동생도 있었다. 일부로 고졸로 학위를 낮춰 지원한 이도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경제구조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프라 구축과 자본재 수입을 위해 많은 외화가 필요했다. 이때 한국이 가진 단 하나의 자원이 노동력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처음으로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파견되었고 나도 1963년 12월에 떠난 선발대에 끼인 것이다.

서독에 가보니 2차대전으로 많은 군인들이 사망한 탓인지 과부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탄광도 많이 기계화되어 있었다. 서독 가기 전 견학가서 보았던 삼척 탄광과는 차원이 달랐다. 엘리베이트로 내려가고 기계로 석탄을 캐고 컨베이어로 실어 날랐다. 나는 주로 컨베이어 스위치 조작을 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는 기생충이 많아 기본 훈련이 끝난 뒤 구충제를 먹고 2,3주간 격리 수용되었다.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면 온도가 높아 기생충이 공기로도 전염된다는 이유였다. 독일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친철했다. 어린 아이들도 나를 ‘헤르(미스터) 초이’라 부르며 잘못된 독일어 발음이 나오면 교정해주었다.

 광산 기숙사에서 동료 한인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대부분 공부를 더하기 위해서 미국이나 프랑스 대학쪽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서독 방문 박대통령  눈물의 연설 “시간을 달라”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국빈방문했다. 그리고 내가 군무하던 뒤스부르크 루르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방문했다. 박대통령은 한인 광부 300여명과 간호원 50명이 모인 강당에서 연설을 하면서 나라가 못살아 이국만리에 몸을 팔러온 젊은이들을 생각한 탓인 지 감정에 북받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으니 ‘시간을 달라’는 말도 남겼다.

 박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와 함께 육촌 동생 육병일이 나와 함께 거주한 인근 하숙집을 방문했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이 역사적인 사진에 나도 들어있었지만 뒷편에서 얼굴이 잘려버렸다. 

 3년 계약기간이 거의 끝났을 무렵 뒤셀도르프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 가서 이민 신청서를 5-6장 가져와 동료들에게도 나눠졌다. 3년 계약기간이 끝나가고 모은 돈도 없어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한국 광부들은 독일 동료들보다 지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종종 독일광부 혹독한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독일 측에서도 한국 광부들이 독일의 정착하는 것을 호락호락하게 용인 하지 않았다.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달리 고용계약이 만기되는 즉시 독일 독일에서 떠나게 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이미 독일 체류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독일에 더 남고자 하는 일부 동료는 간호사와 결혼하기도 했다. 

붐 도시 캘거리로 가라며 그냥 도장 꽝

 쾰른 캐나다 대사관에 이민 인터뷰 하러 갔다. 인터뷰할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줄을 섰다가 중간에 나와 점심을 사 먹고 다시 가니까 내 차례가 지나가버렸다. 순서가 밀렸으나 다행히 5시 15분 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민담당관은 “캐나다 어디로 가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다. 나는 캐나다에 대해 잘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러니까 담당관은 캐나다 지도를 펼쳐보이더니 “캘거리가 붐(boom)도시니까 그기로 가는게 좋겠다”며 그냥 도장을 꽉찍어주었다.   그리고 직업란엔 ‘목수’라고 적었다. 나는 생전 듣도 못한 캘거리란 도시에 ‘목수’로 이민가게 된 것이다.

캐나다로 이민가게 되었는데 비행기표를 구입할 돈이 없었다. 부모님께 송금도 조금 했지만 사람을 좋아해서 동료들과 틈만 나면 유럽여행을 다녔고 술도 한잔씩 하다 보니 돈이 모여있지 않았다.

최덕신 대사에게 항공비 빌려달라고 통사정

 기자를 타고 본 한국대사관으로 가서 최덕신 독일대사를 만났다.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이자 한국광복군을 거쳐 6·25 전쟁 당시 사단장을 지낸 그는 나중에 외무부 장관까지 했으나 천도교와 관련해 월북해버렸다.

 최대사가 “왜 왔어?”라고 물어 나는 캐나다로 이민 가려는데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돈을 꾸러왔다고 통사정을 했다

“야 이놈아.  3년 동안 벌은 돈은 다 뭐하고 돈을 꾸러왔다고?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있나.”

 나는 “살려주세요”하고 빌 수밖에 없었다.

최대사는 수행비서를 불러  텍스 리턴을 신청하도록 관련 중명서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독일에선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지난 3년간 낸 세금을 환급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1967년 그때가 30살 총각이었다. 세금환급으로 비행기표를 구입하고도 200불이 남았다.

그리고 서독을 뒤로 두고 미지의 세계인 캐나다 ‘붐’도시 캘거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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