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저희 아이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주게 됐습니다. ‘멋있다’ ‘나도 하고 싶다’는 말도, ‘성이 뭐 그리 중요하냐’ ‘유난이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가부장제 잔재인 부성주의 원칙을 깨기 위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9일 서울가정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어머니 김 모 씨가 한 말이다.
앞서 법원은 자녀의 성·본을 어머니의 성·본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달라며 엄마 김 씨와 아빠 정 씨 부부가 올해 5월 낸 ‘자(子)의 성·본 변경 허가’ 청구 사건에서 “이유가 있으므로 허가한다”고 결정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자녀 정원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법적으로 ‘김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지난 2013년 10월 결혼한 부부는 혼인 당시에는 자녀 계획이 없었으나, 이후 계획을 세워 올해 5월에 아이를 낳았다.
이들은 임신·출산·육아 과정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과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에 공감해 아버지의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8년 전 혼인신고 때 성·본 협의를 하지 않은 것이 발목을 잡았다.
민법 제 781조 1항은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정한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를 할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만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다.
이들 부부는 결혼 이후 출산 계획이 생긴 부부의 자식은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없도록 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법원에 성·본 변경허가 청구를 냈다.
법원은 이번 판결과 관련해 “자녀의 복리를 위해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는 경우, 부모나 자녀 스스로의 청구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아 변경할 수 있다는 민법에 따른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부부의 소송을 도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와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권리 모임’은 이날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반 가정에서도 엄마의 성과 본을 자녀에게 물려줌으로써 자녀가 입는 불이익보다 이익이 더 크며 궁극적으로 자녀의 복리에 부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며 환영했다.
이 자리에는 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준 이수연 씨도 있었다.
그는 BBC 코리아에 “저희 부부도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줬기 때문에 성평등한 가족을 받아들겠다는 부부의 의지를 법원이 받아들여 줬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씨는 “이전까지의 재판에서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걸리고 기각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들어서 이번에도 오랜 싸움이 되겠구나 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판결이 나와서 놀랐다”라며 “엄마 성 쓰기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는 민법 781조의 부성 우선주의 원칙 자체가 바뀌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원칙적으로는 엄마 성을 쓸 수 있게 된 때는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아기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부부는 여전히 찾기 쉽진 않다.
출산이 아닌 혼인 신고 시 자녀 성을 미리 정해놔야 하는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관습적인 한계도 있다.
그러다 보니 엄마 성을 따르기로 한 사례가 과연 몇 건이나 되는지 관련 통계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다.
(BBC 뉴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