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산골마을서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것

나의 부모님인 김훈과 김인숙은 50년 전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이들은 대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문화 생활을 하고 익숙한 한국 음식과 다른 한국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토론토 시내 세인트 제임스타운의 작은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1983년, 아빠는 유나이티드 교회 목사가 되셨고 엄마와 함께 토론토를 떠나 알버타주 재스퍼 교회로 부임했다. 나는 그 해 말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온타리오로 돌아가기 전인 1987년 아버지는 위베일이라는 훨씬 더 작은 마을에서 목사가 되셨다.

당시 재스퍼에는 유색인종보다 고라니들이 더 많이 살고 있었고 우리는 말 그대로 위베일에서 백인이 아닌 유일한 가족이었다. 사실상 백인 단일민족 공동체에서 한국인 목사 가족으로서, 어쩔 수 없이 맞주치게되는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사람들과의 이런 관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러한 상황들 중 일부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아니더라도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이 만남과 부딪힘 중 많은 것들을 그냥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의 목표는 항상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 사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이러한 대인관계는 백인들이 차별이나 증오가 아닌 소수민족과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같아.
한번은 위베일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 부모님께 일본 문화에 대해 학생들을 위해 발표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캐나다 시골 학교를 보고 싶어 하는 일본 교육 관계자 대표단의 방문을 위해 학교측의 준비 때문이었다.

일본의 한국 식민역사도 모르고 부모님이 단순히 동양인처럼 보여서 물어봤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요청은 대단히 모욕적일 수이었다. 만약 내가 이런 요청을 받았다면, 분명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것을 교육의 기회로 삼으셨다. 다른 공동체를 대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은 할머니께서 일본 점령 밑에서 사시던 시절에 습득한 여러가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학교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온 방문객들을 환영할 수 있는 초보적인 능력을 줄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상황들이 그들을 괴롭힌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불편한 질문들을 하고 있을지라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내가 15살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그레이터 토론토 지역으로 이사했다. 저는 결국 필 지역의 선생님이 되었다.
교육은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때로 인종차별과도 연관되어 있다. 학교 위원회는 학생 인구의 인종과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하지 않는 교사 채용과 같은 시스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교육자들은 우리의 프로그램이 문화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고 학생들은 다양성을 기념하고 인종차별을 식별하도록 배우고 있다.

이 중요한 일이 마침내 교육의 최우선 순위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정으로 다른 문화권의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실수로 말하거나 잘못된 것을 묻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를 주저할 수도 있고,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 다리를 형성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고 걱정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토론토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때때로 다른 공동체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다른 문화들이 서로 옆에 살지만 서로 교류하는 것을 꺼리거나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

이럴 때, 저는 부모님의 목표가 항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는지를 자주 생각하게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아마도 우리의 비슷한 특징 때문에 내가 아시아 학생이나 교직원들과 관련이 있는지 가끔 묻는다. 이 질문들이 어색할 지라도, 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부끄럽게 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집이나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질문이나 논평,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학부모들의 질문에 인내심과 정직함으로 답함으로써 부모님의 선례를 따랐다.


물론, 우리는 고정관념에 뿌리를 둔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공격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의 소극적 대처방식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순진해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의 모멘텀이나 북미에서 반아시아 차별의 부상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아버지는 20년 넘게 그곳 교회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베일 안팎의 가족들로부터 주례를 서거나 장례식을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부모님이 지역사회에 봉사한 친절과 성실함을 기억한다. 우리가 교육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나는 내가 일하는 학생들에게도 부모님과 같은 방식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Nathan Kim : 교사. 미시사와 거주. CBC 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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