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에서 온 경주김씨 나타샤입니다” – 고려인강제 이송의 후예로 캘거리에 살게된 사연

나타샤 김. 이름에서 대충 집안 뿌리를 유추할 수있었다.. 러시아 사할린 출신의 경주김씨 나탸샤를 그가 어카운팅 메니저로 근무하고있는 UV Sanitize NE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어가 능통한데 한국말은 잘 못한다. 도대체 나탸사의 가족들은 어떻게 사릴린에서 살게되었을까? 또 어떻게 캘거리에서 살고있는가? 가문의 내력에 대해 물어보았다.

Q : 사할린 출신이라니 기구한 이민 역사가 있을 것같습니다.

A : 할아버지는 한국지도 북동쪽 끝, 두만강 건너편 하산호수 근방에서 사셨습니다.  한국 중국 러시아 3개국 국경이 맞닿아있는 곳이지요. 이 땅이 어느날 러시아로 편입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사람 약 17만2천명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고려인   강제이주라고 합니다. 한국인이 일본스파이가 될 것으로 우려했다고 합니다. 

카자흐스탄으로 무작정 쫓겨가는 기차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한국인들이 죽었다고 할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이 보리스이고요. 그러다 1950년대 할아버지가 한국어 학교 교사로 사할린으로 이주했습니다.

Q : 외가쪽은 어떻게 사할린으로 가게되었습니까?

A : 어머니쪽은 일제시대 남한에서 사할린 징용공으로 끌려간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쪽은 북한 사투리를 어머니쪽은 남한 사투리를 사용한 것같습니다.

외할머니 삶도 기구합니다. 외할머니는 14살 때 한국계 중국인과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뒤 남편을 여의게 됩니다. 20대 초반에 세살인 딸을 데리고 다른 가족과 함께 일제를 피해 소련땅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배를 타고 오래 가니 모든 것이 눈으로 덥힌 사할린으로 가데 된 것입니다. 그기서 할아버지를 만나 재혼했습니다.  현재 사할린 인구는 약 50만명인데 이중 3만명이 한국계 사람들입니다

Q : 어려운 가운데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이 있었겠지요?

A : 양쪽 조부모들 모두 강인했고 가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었습니다. 1947년생인 아버지도 대학에서 케미컬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사할린 남부 유즈노 사할린스크의 삼육대학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배우고 모스크바 Russian State Humanitarian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사할린 삼육대학은 학비와 생활비가 싼 탓인지 한국에서도 신학을 공부하려 많이 유학왔고 언어를 배우려는 러시아인들도 있었습니다. 한 때 학생수가 500명이나 되었습니다.  모스크바대학은 유학가서 공부한 것은 아니고 컬리큐럼에 따라 사할린에서 공부하고 일년에 두번 정도 모스크바에 가서 시험보고 하는 과정이였습니다. 

Q : 집안이나 뿌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되었습니까?

A : 할아버지는 공산당원이 되셔서 귀족 (양반) 혈통을 따지는 족보같은 것에 큰 관심을 갖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년에 3-4 차례 제사는 지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우리가 경주김씨이고 할머니는 박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수원출신으로 최씨인데 본관 같은 것은 모릅니다.

Q : 캐나다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온 것입니까?

A : 대학 졸업후 항공회사에 다니다 엑슨모빌 (Exxon Mobil)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할린 연안에서 석유 가스 생산을 많이 합니다. 거기서 캐나다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회사일로 사할린에서 영국으로 가게되었는데 11살 아들은 그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은 영국 러시아 캐나다 3개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을 거쳐 2007년 캘거리로 왔습니다.

Q : 캘거리에 러시아 이민자들도 많습니까?

A : 1만명 정도는 되는 것같습니다. 희한하게도 사할린 출신 지인들을 여기서 만나게 되어 지금하고 있는 사업을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Q : 한국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까?

A : 물론입니다. 경주김씨 후예입니다. 한국음식도 좋아하고요. 코리아 아트 클럽에서 한국 전통춤도 배웠습니다. 한국말을 더 배우고 싶습니다. 공산국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특정교회에 나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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