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소서 한국인 처음 만나고 김창영박사 알게되다

캘거리 터줏대감 – 최병기의 끝없는 도전 ③

한국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외로웠다. 나름대로 동포애가 있었고 애국심도 깊었다. 한번씩  이민국에 들러 두터운 이민자 명부를 뒤져보았지만 김,이,박,정,최 같은 한국 성씨는 보이지 않았다. 

폴란드 할머니 하숙집을 떠나 독일인이 사는 집 이층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이 그리워캐비지에 소금 고추가루 마늘 생강 등을 넣어 김치 겉저리를 만들어 먹었 보았다. 쌀도 구하기 힘든시기였다. 그런데 한번은 독일 할머니가 청소하러 왔다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 지 섞은 음식으로 알고 그 캐비지 김치를 버리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다운타운으로 건너갔다. 허드슨베이나 이튼 백화점을 구경하고 세이프웨이 음식점도 들르곤 했다.

캘거리 대학엔 먼저 온 한국인들이 있었다

캘거리에 온 지 두달쯤 되었을까. 한번은 그레이하운드 정류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동양인이 큰 가방들을 지니고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겉모습을 보고 ”아, 엽전이구나!”하고 속으로 말했다. 가까이 가서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었니 “I am from Korea”라고 했다. 캘거리 이민 와서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이다.

백년지기라도 만난듯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갓 이민온 김형수씨 였다. 육사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동기였다.  레스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교수하고 있는 처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처남이 얼마 후 작은 차를 몰고 왔다.  나는 한국 이민자라고 소개했다. 그분은 이듬해인 68년 이민 온 양재설씨 부인의 사촌인가 육촌 오빠였다.

그 분은  캘거리 대학에  김창영 교수님이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장 공중전화박스의 두터운 ATC 전화번호부를 뒤져 Y.C. Kim울 찾았고 바로 전화했다.

김박사님도 몹씨 반가와했다. 내외분이 곧 내 자취집으로 달려오셨다.  사모님, 염순복 여사은 며칠 뒤 자기 집 가까이 하숙이 있으니 옮기라고 권유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든 영국인 부부의 이층방으로 바로 이사갔다. 김박사님은 나처럼 이민을 온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65년 9월에 캘거리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온 분이었다.

 한국 이민자의 대부 캘거리 대학 김창영 박사

캘거리 한인 이민자의 대부 캘거리 대학 김창영 박사

두분은 그야말로 캘거러 한인 이민자들의 대부였다. 두 분 모두 소탈하고 정이 참 많았다. 그분들의 집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아지트고 사랑방이었다.

 사모님은 틈만 나면 밥 먹으러 건너오라했다. 바비큐도 많이 구워즈셨다. 나는 두 애들의 베이비시터 역할도 했다.

김박사님 내외는 돈도 조금 융통해주어 중고차도 하나 마련할 수 있었다. 한번은 출근전 엔진 예열을 위해 시동을 걸어 놓았는데 불이 타는 일이 있았다. 그런 보험 처리도 김박사님이 도와주셨다.’

내가 캘거리로 온 67년 봄부터 한국인들이 한 두명 씩 이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캘거리대학에 Ph D를 하고 있는 정경훈씨와 교환교수였던 이익춘박사도 계셨다. 이박사는 나중에 인하공대학장으로 재직하셨다. 

 독일 간호사 광부 출신도 건너왔고 병아리 감별사로도 이민온 사람도 있었다. 양재설씨처럼 토목기사도 오기 시작했다. 전영자씨와 오필호씨는 병아리 감병사로 왔다. 병아리 감별은 주로 야간에 하는데 어린 병아리의 암수 구별을 위해 계속 들여다 봐야 하니 눈이 계속 침침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오필호씨 부인은 한국 치과의사 출신인데 여기서 개업할 수 없어 치과 간호보조로 일하기도했다. 캘거리를 거쳐 다시 토론토나 밴부버로 간 분들도 적지 않다. 

 67년 이후 5년 동안 공항에 자주 갔다. 한국 사람이 오면 집이나 일자리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의 콩클리시도 도움이 되었다. 지금 이민 오는 분들은 영어도 잘하고 돈도 많이 가져올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영어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가져올 수 있는 돈도 몇 백불 되지 못했다.

새로 이민 온분들은 콘도는 비싸서 못들어가고 대개 싼 지하 스위트나 값싼 하숙집을 얻고 일자리부터 구해야 했다. 김창열박사 부부는 언제나 이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잔정이 많은 김박사 사모님은 한국 사람 챙기는데 언제나 열심이었다. “미스터 최, 메디신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혼 간호사 두 명 한국 음식 먹도록 해야겠으니 좀 데려와 줄애요? 그런 부탁을 자주하셨다. 그러면 내가 몇 시간 차를 몰고 가 그분들을 픽업해오고 또 귀가를 도와주었다.  노총각이었던지라 두 간호사 중 젊은 간호사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선임 노쳐녀 간호사가 작업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차 시트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도 잠만 자던 미스민

또 한번은 사모님이  벤프 아트 스쿨에 유학하고 있는  미스민을 데려와 한국 음식 함께 먹자고 말했다. 한국 음식 파티가 끝나고 다시 밴프로 데려다 주러 갔는데 미스민은 차만 올라타면 그냥 잠만 잤다. 

68년 8월 미네와카 호수 야유회에서 백선엽대사와 함께 한 한인들. 뒷줄 왼쪽부터 김창영박사, 영사, 김형수, 홍성만, 이재호, 양재설 부인, 김형수부인, 백대사, 이윤교, 홍성만 부인, 정길수 부부, 양재설, 압줄 왼쪽이 필자. 오른쪽부터 이재호부인 염순복

한번은 담배꽁초를 밖으로 던졌는데 그게 뒷창문을 통해 차안으로 다시 들어왔고 시트에 떨어져 불을 붙어 연기가 났다.

 시트가 타고 냄새가 나고 연기가 나고 있는데 미스민은 계속 자고 있었다. 그래도 총각이 라이드를 주고 세계 최고의 데이크코스를 왔다갔다 하는데 미스민은 노총각인 나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67년 한국대사관에서 캘거리 한인회를 조직하라며 20불을 보내와 크리스마스 전에 몇몇 안되는 한인들이 모여 한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은 김창영박사였고 내가 총무였다. 그리고 이듬해 8월 백선엽대사가 캘거리를 찾아주셨다. 백대사를 모시고 한인들 모두 미네와카 호수로 놀러가 소풍 가 바비큐도 구워먹고 기념촬영도 했다.

(사진 설명 : 67년 가을 캘거리 한인들. 왼쪽부터 전영자,오필호 부인,이윤교,김창영,정경훈,필자, 염순복, 토론토에서 놀러온 간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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